하염없이 걷고 멍하니 바라보는 도시
* 웹 매거진 LiiS에 기고 중인 아티클입니다. 원문은 LiiS 웹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안녕하세요. 에디터 B입니다.
지난 해 여름의 초입, 정말 오랜만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의 여행을 즐기시나요? 저는 일단 걷습니다. 하염없이요. 하루에 최소 다섯 곳은 들러야 마음이 놓이는 타입이거든요. 바쁘게 움직이며 보고, 걷고, 기록해야 진짜 여행 같달까요. 이번엔 그런 저의 여행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지는 도시, 가나자와에 다녀왔습니다. 오래된 골목, 근사한 정원, 독특한 미술관과 전통시장까지. 그럼 저와 함께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걸어보실래요?
여행의 첫 목적지를 가나자와로 정했던 저는, 오사카에 도착해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며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이 도시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그 어느 것도 과하지 않다는 것. 사람도, 거리도, 소음도 넘치는 것 없이 모든 게 딱 좋았습니다. 관광지라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도시 전체가 잠깐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죠.
가나자와는 겉보기엔 명상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사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유를 즐기기 좋은 도시로 이름이 난 곳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왜 소제목에 굳이 ‘명상’을 넣었을까요? 올해 들어 명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깨달았거든요. 가나자와에서 제가 했던 게 바로 명상과 비슷한 경험이었다는 걸.
오미초 시장에서 시작해 히가시차야 거리로 이어지는 길은 한적했습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어요.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그대로 느껴지는 발의 감각, 골목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의 온도, 오래된 나무 간판이 삐걱거리는 소리. 오래된 주택 옆으로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요. 짧은 여행에서 최대한 많은 곳을 보고 싶어 동선을 촘촘하게 짜두었기에 구글맵에는 별표가 빼곡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가나자와 시내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 혼다마치라는 조용한 동네에 다이세츠칸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스즈키 다이세츠칸. 일본의 대표적인 선불교 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입니다.
건축은 다니구치 요시오 Taniguchi Yoshio가 맡았습니다. 뉴욕 MoMA를 리노베이션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축가죠. 건물은 단순하고 절제된 구조로 높지 않은 벽과 넓은 창, 여백이 강조된 공간이 매력적입니다. 어두운 현관동과 전시동을 지나면 한순간 시야가 밝아지며 수경정원이 나타나는데요, 건물 안이지만 밖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수경정원은 빛을 가득 머금고 반짝입니다. 사색공간동의 다다미 의자에 앉아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요. 말로만 듣던 물멍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던 순간입니다.
�스즈키 다이세츠칸 Suzuki Daisetsu Museum
주소 | 3 Chome-4-20 Hondamachi, Kanazawa, Ishikawa 920-0964 일본
운영 | 9:30-17:00 (입장 마감 16:30), 휴관 월요일
요금 | 성인 310엔
다이세츠칸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겐로쿠엔이 있습니다.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로, 마에다 가문이 에도시대부터 조성해 온 산수정원입니다. 연못과 다리, 소나무와 돌로 구성된 풍경은 어느 계절에 찾더라도 저마다의 볼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봄에는 매화와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과 다양한 들꽃으로 눈부시고, 가을에는 새빨간 단풍으로 물듭니다. 신기하게 정원임에도 겨울철 관람객이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연못가를 따라 서 있는 소나무에 눈이 쌓인 풍경이 낭만적이기 때문.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마치 우산처럼 생긴 구조물을 나무에 설치해 두는 ‘유키즈리’가 유명합니다.
겐로쿠엔은 아침 일찍 방문하면 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갈하게 가꿔진 물가를 지나 이끼로 덮인 작은 언덕을 오르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공간입니다.
� 겐로쿠엔 Kenroku-en Garden
주소 | 1 Kenrokumachi, Kanazawa, Ishikawa 920-0936 일본
운영 | 7:00-18:00 (3-10월), 8:00-17:00 (11-2월)
요금 | 성인 320엔
겐로쿠엔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이 등장합니다. 동그란 형태의 건물 외벽은 대부분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작품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내부는 미술관보다 왠지 실험실에 더 가까워 보였어요.
가장 유명한 전시는 수영장 아래로 관람객이 들어가는 레안드로 에를리히의 작품 <The Swimming Pool>입니다. 수영장 아래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면,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순간이 주는 짧은 놀라움과 웃음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죠. 이 외에도 유머로 가득한 작품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설치 미술품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어요. 정적인 다이세츠칸에서 나와 다시 자극을 느끼고 싶을 때, 둘러보기 좋은 장소입니다.
�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주소 | 1 Chome-2-1 Hirosaka, Kanazawa, Ishikawa 920-8509 일본
운영 | 10:00-18:00 (금·토 20:00까지), 휴관 월요일
요금 | 상설 전시 무료, 기획 전시 유료
명상은 꼭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걸으면서 복잡한 생각을 비우려 노력하거나,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으니까요.
한적한 골목, 청량한 물소리, 느린 발걸음 같은 순간들. 가나자와는 쉼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날이면 그때의 순간들이 종종 생각납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때의 호흡을 다시 꺼내 쓰고 싶어집니다. 조금 덜 서두르고, 조금 덜 복잡한 하루를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