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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l 24. 2023

예술과 전시가 있는 서점, 더레퍼런스가 있는 곳

“긴장, 기대, 유혹 쪽에 있는 것은 열에 들뜬 의지이다. 책은 언제나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_ p.12 장-뤽 낭시 지음,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도서출판 길)


처음부터 서점지기를 꿈꾼 것은 아니다. 벌써 이 십여 년 전 일인데, 내 생애 첫 아르바이트는 대학시절 도서관 열람실 서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탐독보다 탐색을 즐겼다.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테이블에 쌓여 두터워진 책 등의 마디마디에서, 엄숙한 분위기의 붙박이 서가에 꽂힌 책들의 크기와 무게가 서로 다른 것을 보는 게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책에 대한 열망은 시간이 흘러 나의 업(業)이 되어갔다. 



독립 출판사가 운영하는 예술전문서점

처음에는 도서관 알바생으로 다음은 예술사진잡지 편집장이자 출판사 편집장/발행인으로, 그리고 지금은 예술과 전시가 있는 서점 ‘더레퍼런스’의 운영지기가 되어있다. 모든 건 “열에 들뜬 의지”에서 시작했다고 해야할까. 미래에 자신을 그리던 시절, 패션 잡지 편집장이나 아트디렉터가 인생의 종착지가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예술과 사진을 택했고, 안정적인 생활형 직장인보다는 ‘소규모 1인 출판사 이안북스의 발행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그렇게 2007년 12월 아시아 예술사진잡지 IANN이 첫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 출판사 FOIL과 함께 공동출판으로 한/영/일 3개국어로 발행된 이 잡지는 일본의 롯본기 츠타야, 아오야마 서점부터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미국 사전전문기관 ICP등, 유수의 미술관, 아트북 서점으로 유통 판매되었다. 반면 국내 유통 상황은 참혹했다. 안타깝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대형 서점의 잡지 매대는 반년 간지는 물론이고 계간지조차 월간 잡지처럼 1 개월의 유통기한이 있었고 매 월 말이면 매대에는 신간들로 채워졌다. IANN 잡지도 한달이 지나면, 번번히 창고 재고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서점을 창업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느덧 십 여년 출판사를 경영하다 보니 우리와 같은 소규모 독립출판사나 1인 제작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였다. 출판 기획보다 어려운 유통∙판매의 고배를 마셔본 입장에서 무슨 객기인지, ‘아트북 장르’를 개척하는 제작자들의 책을 모아 소개하는 ‘오피스 겸 서점’이라도 꾸며보자고 한 것이 더레퍼런스의 시작이다. ‘아트북을 매개로 아이디어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이자 사유하는 공간, 그래서 더레퍼런스에는 언제나 예술과 전시가 있다’. 또한 레퍼런스의 속뜻처럼, 참고하고 참조할 수 있는 서적이 있는 열람실이며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나 북토크가 열리는 아트북라운지이기도 하다. 


만남의 장소이자 사유의 공간 

출판 편집자로서의 예술, 사진이란 콘텐츠에 매력을 느껴 책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막상 서점 운영지기 입장에 서 보면 독자의 다른 시선을 목도하게 된다. 예술은 문학과 달리 넘사벽이 높고, 아티스트 북이나 사진책은 특히 글 위주의 예술 서적에 비해 구매력이 상당히 적다. 여기에 일반 도서에 비해 값비싼 아트북은 ‘예술’이라는 단어만 붙여도 일단 뒷걸음질 쳐진다. 독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인테리어용 커피 테이블 북조차 예술적 감각이나 취향이란 부담을 갖기 십상이다. 

여기에 예술만큼 일상 생활에 쓸모 없는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단연코 나에게 예술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세상에 불필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사회 통념에 반하는 비주류적인 시선이나 목소리는 작지만 깊은 파동이 있기 때문이다. 더레퍼런스에 톡톡(TalkTalk)이나 와이 아트 와이 북(Why Art, Why Book?)은 전시 연계형 작가와의 대담으로, ‘왜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티스트의 진지하면서도 일상의 덧없는 사유 방식을 경험할 있는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삶에서 당연하고 믿는 전제들을 비판적∙미학적인 태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작가와 독자(또는 관람자) 간에 교감이 깊어지면서 점차 프로그램의 평가도 높아지고 있다. 책을 파는 상인이기에 앞서 기획자로서 서점의 역할을 확장시켜 보면 가장 애착이 커지는 이유는 이러한 ‘만남의 장소이자 사유의 공간’이 작동할 때이다. 

 

미술관에는 큐레이터 서점에는 아트북 큐레이터 

최근에는 콘텐츠 특화형 전문 서점도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더레퍼런스는 2018년 효자동 서촌에 자리잡으면서 매년 ‘책’을 중심으로 큐레이션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3층에 2호점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예술전문서점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더레퍼런스에는 크게 예술 서점과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큐레이션된 전시는 동시대 예술에 대한 재미와 미적 체험을 담당하는 공간이라면  큐레이션된 서가는 예술과 건축, 사진과 디자인 등 광범위한 책을 선별적으로 다루며 다양한 경로로 소개하는 기능을 하고있다. 무엇보다 이 공간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술활동이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도록 돕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책을 선택하고 연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도서관 사서(司書)와 같이 전문직으로 책을 다루는 북 큐레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에 큐레이터가 있는 것처럼, 책을 소개하는데 큐레이터에 역량은 서점의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선정되어 서가와 테이블에 놓인 책들은 우연과 직관이란 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에게 마음에 가 닿는다. 어떤 면에서 신간을 소개하는 것보다도 오랫동안 묵혀 있던 책들을 새로 연결 짓는 것이 훨씬 어려운데 그 원인의 대부분이 서점지기의 책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없어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거나 진열된 책들 자체에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를 들어 도서관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서관은 수백 만 종의 다양한 책들을 청구기호로 배열하여 정리함으로써 방문객의 목적에 따라 책을 손쉽고 빠르게 찾도록 돕는다. 여기에는 시간의 효율성이 필요하다. 반면 소형서점은 우연한 기회에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책과 책 사이, 제목과 문장 사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의식의 흐름을 연결 지어 가는 여백이 필요한 장소일 수록 매력적이다. 그렇게 독자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이다. 전시를 보고 서점으로 들어오는 것도 이러한 여운을 만들어 낸다. 말하자면 책의 양보다 굿 큐레이션(Good Curation)이 훨씬 중요하다. 방문객이 자연스레 “어 이게 왜 여기에 있지?”라고 궁금해하며 책 장을 넘겨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도록, 새로운 관점에서 아트북을 선택하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트북 큐레이션이 전시 기획자의 활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큐레이트(Curate)의 뜻이 "전문 지식을 사용하여 선택, 구성 및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아트북 큐레이터는 ‘책을 매개로 예술을 소개하는 전달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예술전문서점이 전시 기획부터 프로그램 운영, 책 선별까지 전반의 영역을 포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에서 더레퍼런스는 아트북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한다. 서점 판매원도 큐레이터라고 할 수 있기에, 스탭 모두가 우선적으로 예술에 대한 지식을 쌓는 훈련의 일환으로 책 리뷰도 꾸준히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책을 다루는 업은 지적, 물리적 노동의 집약체와 같다. 정말 수고스럽고 할 일이 태산이지만 스탭 각자가 책을 이해하고 자신 있게 추천하며 때로는 친구에게 편히 책을 빌려주듯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상상하곤 한다. (나조차도 여전히 책을 몇 권 추천해달라고 할 때 머리 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지만) 아트북 큐레이터는 책 제작부터 유통, 전시에 대한 전 과정을 경험하면서도 예술을 수집하고 공유하는 발신자로서, 미술관 학예사만큼이나 전문성이 역량이 필요하다.



“서적상의 독서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를 오롯이 해독해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독서는 ‘읽기’이면서 동시에 ‘선택하기이다.”

_ p50 장-뤽 낭시 지음,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도서출판 길)


이제 갓 세 살, 삼 년 반의 시간을 보낸 더레퍼런스는 현재 27번째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가끔 혹자는 갤러리나 대안공간으로 헷갈리는데 나는 “아니요 저희는 서점에 전시가 있는 복합문화공간이에요.”라고 바로 정정한다. 최근 복합문화공간에 서점을 운영하는 공간도 꽤 늘었다. 책이 풍성한 공간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나는 서점이야말로 책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다. (ㅎㅎ) 까페를 함께 운영해보라는 권유도 받지만 그건 북까페가 아닐까? 오롯이 독자적인 예술 서점을 만들어보자는 의지와 ‘업’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시작한 일이다. 길이 없다면 징검다리라도 만들어 건너 보자는 마음도 여전하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힘겹게 고군분투하다 보면, 내 의욕과는 상관없이 이 일에 전문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출판사에는 편집자나 마케팅, 경영과 같은 영역이 있지만 서점상은 주어진 일에 비하여 전문성을 보장받기 어려워서다. 학예사처럼 사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출판 전문직이 생긴다면 어떨까? 더레퍼런스의 미래를 꿈꾸다는 건 이 숙제를 하나 둘 풀어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도서관 알바생에서 서점 운영지기가 되기까지, 내 전문성을 다져가듯, 새로운 길을 향하여 오늘도 묵묵히 걷는다. 


*본 아티클은 <국회도서관 책방통신>에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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