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용 사진의 'B컷 예술과 A컷 기록' 사이에서
사진작가 김한용은 1947년 국제보도연맹 사진기자로 입사해 보도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화, 인물, 상업 사진 등 다양한 범주에서 사진의 길을 걷는다. 1959년 충무로에 국내 최초의 광고 사진 스튜디오인 ‘김한용사진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으로 광고 사진가로 활동하여 명실공히 ‘한국 1세대 광고사진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이 사진집(photobook)은 김한용이 광고 사진가로 활동하기 이전인 1950-60년대에 촬영한 영화 스틸 컷을 엮은 첫 아카이브 책(photo-archive book)으로 총 395점의 사진과 511점의 메타데이터를 수록한다. 김한용의 사진아카이브는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에 힘입어 만들어진 아시아 문화아카이브를 발단으로 하여 탄생했다. 당시 이 연구 프로젝트를 맡은 한금현은 한국 근대사진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쳐 8명의 한국 사진가를 선정하였으며, 김한용의 수십만 점의 필름 속에서 1만여 점을 선별, 정리하여 첫 디지털 아카이브로 남겨지게 되었다. 사진가 김한용의 70여 년 간 축적된 사진들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운명을 같이한 역사적 자료이자 생활문화사가 집약된 문화콘텐츠로서 기능하게 하는 첫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기억장치로서 작동하는 사진은 시간을 오브제로 삼는 시각 매체이다. 한 개인의 사적인 기록부터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과 사회를 연결하는 ‘인류학적 유물’이자 ‘메타-이미지’까지, 사진은 현재를 기록하는 순간, 지나간 과거의 모호한 흔적으로 드러난다. 아날로그 사진이 가진 잠재력은 필름이나 인화지에 시간을 정박시키는 물리적인 감각에 있다. 쉽게 휘발되거나 잊혀지기 쉬운 디지털 사진과 달리 아날로그 사진은 소유가 가능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한용의 영화 스틸 컷을 인쇄물로 아카이빙한다는 것은 물리적 오브제로서의 이미지들을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무의식 속에서) 의식적으로 문맥화하는 시도이며, 독자에게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발견된 사진’을 경험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이자 연구・기획자인 한금현은 김한용의 사진아카이브가 작가로서 개인을 조망하는 기록물인 동시에 공적인 자산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방되고 확장된 의미의 아카이브 자료화에 주목한다. 제대로 된 정리와 보존에 중점을 둔 ‘열린 자료’는 그 자체로 훌륭한 메타데이터로서 기능하며, 각 이미지의 활용도가 높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애써 구축한 아카이브가 찾기 어렵거나 이미지 데이터 접근성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죽은 자료’라고 보는 사진아카이브에 대한 시선은 사진집의 기획,편집,디자인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방향에도 긴밀한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사진집은 창작 주체이자 저자에 해당하는 사진가의 작업 의도를 최대한 반영한다. 이미지 중심의 사진집에서 핵심적인 디자인 요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책의 지면에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레이아웃과 촉각적인 오브제로서의 종이의 물성에 있을 것이다. 사진이란 매체의 특성상 원본 작품과 흡사하게 인쇄가 가능하므로 사진가 대부분이 이미지 순서나, 종이, 인쇄 수준 등에 매우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여타 책에 비해 사진집은 유달리 책의 판형이나 종이, 인쇄 톤의 상태에 대한 사진가의 승인이 중요한 편이다. 여기서 책의 심미적 시각 효과(도판의 크기와 순서, 글과 이미지 간의 레이아웃 등)를 돕는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역할은 북 프로젝트의 공동 협력자로서 사진 책의 완성도를 책임진다. 반면, 김한용의 스틸 컷 아카이브 책(photo-archive book)은 이미지의 원작자인 사진가와 디자이너, 기획자(또는 이미지 편집자) 간의 공동 창작물에 더 가깝다. 원로사진작가 김한용이 70년 간 작업한 사진의 양에 비교한다면 그의 사진 책 발행 종 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추측건대 이러한 배경으로는 국내 사진출판시장의 열악한 환경 문제를 포함해, 그의 사진 대부분이 상업적 목적으로 촬영한 광고사진임에 기인하는 저작권 문제, 당시의 사진 책 대부분이 휴머니즘에 근간한 다큐멘터리 사진에 편중되어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실 그의 발간물 중에서 작품집으로서의 형식을 갖춘 책은 ‘소비자의 탄생’을 주제로 김한용의 광고사진을 조망한『김한용 광고사진과 소비자의 탄생』(가현문화재단, 2011) 전시 도록이 대표적이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사진작가의 주요 작품을 조망하는 기획자의 시선과 편집자, 디자이너 간의 긴밀한 공조를 바탕으로 작품성과 기록성 양쪽 모두를 고려한 데 있다. 사진아카이브는 작가가 만든 작품 목록을 기반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사진을 목록화하여 선별한 시각 자료 측면이 강하지만, 동시에 이미지 고유의 추상적이면서도 물리적 감각 또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미 정리된 사진아카이브라고 할지라도 그의 수백 장의 스틸 컷을 기획/편집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과 관점에서 - 작가에 의해 창조된 미학적 의미로 바라볼 것인가, 문화사회적인 측면에서 실용적 도큐멘트 기록물로 이해할 것인가 – 책의 구조를 상상하게 만든다.
『스틸 컷: 1950-1960년대, 김한용 아카이브』(이하, 스틸 컷: 1950-1960년대)는 김한용의 사진아카이브 중에서 1950-1960년대에 걸쳐 작업한 총 13편의 한국영화 스틸 컷과 각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 그리고 영화 상영 당시의 시대상을 찾아볼 수 있는 스트리트 사진과 촬영 현장, 감독과 스태프 등, 크게 3부로 구성되었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영화 스틸 컷의 메타데이터만을 모아 수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시각적 플롯은 어떠한가?
각 영화 사진의 순서는 이미지 한 장 한 장의 예술성보다는 실제 영화의 스토리를 추측하거나 그와 유사하게 편집하는 데 보다 집중한다. 애초에 김한용의 영화 스틸 컷은 영화 제작이나 홍보를 위해 제작사 또는 감독의 의뢰로 시작되었으나 대부분은 유실되고 현재 아카이브로 남은 필름들은 대부분 채택되지 않고 작가의 손에 남겨진 B컷 사진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소위 ‘잘 찍은 A컷 사진’이 사라진 상태에서 ‘B컷 필름 이미지’는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로서 이미지와 이미지 간에 연동되어 ‘영화 속 장면의 네러티브’를 유추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의 순환 구조는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김한용의 사진 이미지에 관한 시선을 자연스레 객관적인 자료이자 시각정보로 이동시킨다. 역설적이지만 A컷의 부재로 남겨진 B컷 사진아카이브는 한국 시각문화 및 영화사적 측면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는 고증자료이자 시간의 기억장치로서, 더할 나위 없는 A컷 사진으로 탈바꿈한다.
이처럼 아카이브로서의 사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열린 해석의 가능성’에 있다. 『스틸 컷: 1950-1960년대』에서 열린 시각적 플롯과 각 페이지의 레이아웃 공간을 구조화하기 위하여, 공동협업자인 출판편집자와 디자이너는 특히 메타데이터로 정리된 사진의 키워드와 분류체계를 바탕으로 각각의 이미지 정보를 손쉽게 찾고 접근할 수 있도록 페이지 배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부록처럼 영화 스틸 컷을 망라한 메타데이터를 첨부했으며,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모든 사진에는 메타데이터 번호를 기입하여 추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으로 작동하도록 디자인하였다. 물론, 책의 구조 안에서 기술(記述)적 보완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동적인 지면 연출을 위한 네러티브 구성과 이미지 편집에도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김한용의 스틸 컷 필름은 대부분 6×6 포맷의 정사각 프레임 사진이 주를 이루며, 영화 촬영장의 각 장면을 연속 촬영한 컷이 많은 편이다. 이를 바탕으로 디자이너는 각 영화 속 네러티브 또는 특정적 사건이나 시간의 간극을 시각화하는 방법을 통해 사진의 단순 나열을 넘어서 4개의 이미지 프레임을 다양한 레이아웃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그리드 형식은 결과적으로 영화 속 미장센을 유추하거나 비연속성 상의 장면 연출에 시간성을 더하며 이를 이야기의 흐름으로 재탄생하게 한다. 물론 다양한 장르의 영화 레퍼런스가 되는 이미지 한 장 한 장의 풍성한 시각정보는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사진읽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사진집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바로 표지 사진이다. 수백 장의 영화 스틸 컷 대부분이 연기하는 배우들과 촬영 감독, 스태프, 또는 영화 세트장의 풍경 사진인 데 반하여 표지 이미지로 선택한 사진에는 영화 촬영 현장의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 모두 들어가 있다. 표지는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는 상징성을 띤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 프레임이기도 하다. 디자인 측면에서 드라마틱한 시각 연출을 위해 그래픽 요소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책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스틸 컷: 1950-1960년대』를 바라보는 디자이너의 결정적인 이미지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과거를 향한 기록 매체로서 사진은 실제 존재했던 사건과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시간의 간격(망각)을 두며 서서히 ‘불완전한 기억과 기록 언저리에서 맴도는 자국’이 되어버린다. 이 사진집의 가장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사진 속의 생생한 이미지 상태일 것이다. 변색이나 스크래치 또는 먼지가 가득한 필름 사진들을 일일이 보정하여 디지털화한 사진아카이브는 의뢰로 생생한 현장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방부제로 노화를 방지한 듯, 섬세하게 리터칭한 디지털 사진의 표면은 매끄럽다. 여기에 아날로그 사진이 가진 촉각적 감각- 심리적 외상(外傷)을 불러일으키는 초현실적 감각의 흔적들-이 사라진 상태의 사진 속 지시 대상들은 날카로운 기표들이 되어 돌아온다. 결과적으로 김한용의 스틸 컷 사진은 과거에 대한 어떤 향수나 강렬한 감정적 환기를 이끄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우리는 1950-60년대 잃어버린 시대, 그 과거를 향한 상실된 실제들의 대체물이자 시간의 오브제가 된 아카이브 책을 통해 사진이 가진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 아티클은 이안북스 <스틸컷: 1950-60년대 김한용 아카이브>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집은 하단 링크를 통해 참고해주세요.
https://www.iannmagazine.com/?p=6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