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노 Oct 08. 2023

[칼럼] 상실의 코드

연극 '우주로봇레이' 리뷰

저 멀리 바다 건너 그리스에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남자가 있다고 한다. 그 산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정상에 도착한 순간, 바위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러면 남자는 바위를 다시 산 정상까지 밀어올렸다. 오래전 신을 능멸한 대가로 벌써 수천 년째 남자는 그 벌을 받고 있었다.


이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리다 문득 남자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힘겹게 산꼭대기에 오르자마자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봤을 때. 떨어진 바위를 좇아 산을 내려오는 동안에. 다시 출발점에 서서 자신이 올라야 하는 그 가파른 길을 쳐다보는 순간에. 그가 느낀 상실감에 대하여. 막막함에 대하여. 모두가 이야기의 교훈에 매달리느라 수천 년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 마음이 궁금했다.





시놉시스.

한 무리의 존재들이 나와 극장을 우주로 만든다. 회사의 로봇 레이에 대한 광고가 한가득 진행되고, 남주의 곁으로 레이가 도착한다. 그런데 레이는 작동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을 인간이라 소개하며 다짜고짜 남주의 심장소리를 듣겠다며 달려든다. 남주는 밀쳐내고 레이는 고장난 것처럼 보인다. 남주는 당황하여 그런 레이를 회사에 교체해달라고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도 이제는 남주의 생명정보데이터 수집도 완료하고, 남주 대신 출근하겠다는 레이. 남주와 레이의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중 레이 개발자 남박사의 안락사 직전 남박사는 모든 레이에게 숨겨져 있던 코드를 발동한다. 이로 인해 모든 레이는 특이점이 생기고, 남주의 레이도 고통스러워한다. 회사에서는 모든 레이들을 회수하려고 하고 이를 막는 남주와 회사원들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는데.


1. 정반합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정-반-합’이라 불리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정)이 등장하면 그것을 반박하는 이론(반)이 등장하고, 상반된 두 주장은 끈질긴 토론 끝에 종합적인 결론(합)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연극 <우주로봇레이>에서도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등장한다. 인간과 로봇 레이. 인간은 로봇 레이의 주인으로서 우월한 지위에 있지만 로봇 레이와 비교하면 능력도 부족하고 몸도 연약하다. 반면 로봇 레이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등 능력도 우월하고 인간과 달리 죽지도 않는다. 허나 로봇의 3원칙을 토대로 인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사건으로 세상의 모든 레이들에게 특이점이 발현했다. 레이들은 자신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정과 반이 만나면 합이 도출된다. 오랜 역사의 법칙에 따라 인간들도 대응하기 시작했다. 죽지 않는 레이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인공장기로 교체하고 영원불멸한 삶을 얻게 된 것이다. 레이 역시 끊임없는 투쟁 끝에 차별금지법과 출신기록방지법을 통과시키며 인간과 동일한 권리와 지위를 획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갈등의 과정을 실제 인류 역사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레이들은 3월 1일에 맞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세운동을 펼쳤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마지막 인간의 이름은 ‘마틴 루터’였다. 당연하겠지만 3.1 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모티브 삼은 장면이다. 차별금지법 같은 현대 사회의 이슈도 짧게나마 등장했다.


연극의 1부는 극중 500여 년에 달하는 이 지난한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들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혁명, 3.1 운동, 흑인민권운동 등등. 부르짖는 주체도, 부르짖는 이유도 제각각 달랐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도 인간이다.” 그럼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대관절 인간이란 무엇일까.



2. 심장 박동


연극의 2부는 그 질문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심장’이 있었다.


극중 레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겉모습만으로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심장 소리는 인간과 레이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진 못했다. 레이들이 작은 사운드 카드를 통해 가짜 심장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진짜 인간들은 몸을 인공 장기로 교체하면서 더 이상 심장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심장 박동은 인간과 레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했다.


자, 그럼 왜 심장 소리가 중요한 걸까. 인간의 심장은 분당 60-80회 정도 뛴다고 한다. 초당 최소 1번씩은 뛰는 셈이다. 꼭 시계를 보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심장 소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심장이 뛴다는 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극중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는 존재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무한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애초에 로봇이었던 레이와 심장을 인공 장기로 교체한 인간들은 무한한 삶을 통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 그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허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이 꼭 행복을 의미하진 않았다. 시간은 오로지 유한한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래야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므로. 무한한 삶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 즈음부터 어떤 선택을 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아니면 우주로 떠나거나.


다만 어떤 이들은 잃어버렸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종종 되찾기도 했다. 어떻게 되찾았냐고? 바로 ‘상실’을 통해서다.


출처 - 인터스텔라


3. 상실의 경험


극중 주요 인물인 남박사, 남주의 레이, 윤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상실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박사의 경우 오래전 모종의 이유로 딸을 잃었다. 이에 남박사는 로봇 레이를 만들며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죽은 딸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남박사는 주변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공장기를 이식받는 대신 안락사를 택했다. 상실의 경험은 그/녀를 끝내 유한한 인간의 삶에 머물게 만들었다.


남주의 레이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원래라면 그는 시간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육신은 완전무결했고 영원불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주를 떠나보냈던 상실의 경험이 그를 시간에 영향받는 존재로 만들었다. 남주가 떠난 오백 년 동안 레이는 남주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남주와 똑같은 취미(나무에 물을 주는 일)를 가진 윤하를 만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허나 윤하에겐 남주와 달리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레이는 여전히 남주를 그리고, 기억하며, 남주처럼 심장 소리를 지닌 인간을 찾아 헤맸다. 쓸데없는 노력이라며 윤하가 그를 말렸지만 레이의 마음이 꺾이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귀에는 희미하지만 두근거리는 생명 신호가 여전히 들려왔기 때문이다(이는 어쩌면 그가 다른 레이들과 달리 시간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겪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케이스는 윤하였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그녀는 인공장기로 몸을 대체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심장 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레이가 우주로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면서 그녀 역시 비로소 시간을 체감하게 된다. 레이를 떠나보낸 상실의 경험이 그녀를 시간에 영향받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이제 그녀는 레이에게 살갑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레이가 없는 현재에 서글퍼하며, 언젠가 레이가 돌아올지 모르는 미래에 대해 간절해졌다.

“보고 싶다, 내 딸아”


극중 남박사는 안락사 직전, AI 시스템인 판도라를 통해 레이들에게 숨겨둔 코드를 발동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코드의 명령어가 남박사의 상실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 싶다, 내 딸아. 그 한 마디에 레이들은 일제히 불안에 떨었다. 혼란스러워했다. 이윽고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를 발견했고, 자유를 얻고자 인간들에게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상실감이 레이들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4.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모두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허나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일까. 연극 <우주로봇레이>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다. 뿐만 아니라 극중 인간들은 레이의 등장 덕분에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결국엔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나무에 물을 주는 작은 일이라도 말이다(남주는 그 일조차 레이에게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다).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는 것 같다.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지만 그 순간 또다시 상실을 마주해야 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의 굴레.


모든 이야기는 두 번 시작한다. 극장 안에서, 극장 밖에서. 극장 안에서 연극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1부에서는 소동을 보여주었고, 2부에서는 인간에 대해 물었다. 3부의 무대는 극장 밖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의 굴레를 인식한 지금, 인간에 대해 알았으니 그다음은 삶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 무대의 주인공은 나를 비롯한 여러분이 될 것이었다.


인간과 우주, 시간과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특한 연극 <우주로봇레이>는 오는 15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6983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6983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수영을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