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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Nov 23. 2023

[Review] 두 번째 선택

연극 '낮은 칼바람'

Synopsis

1931년 만주, 하얼빈 북쪽 대흥안령 아래 외딴 객점. 객점 주인 ‘용막’과 건달 ‘종수’ 그리고 ‘수염’은 한족 지주들과 어울려  며칠째 투전과 아편에 빠져 있다. 객점의 일꾼 ‘금석’은 용막의 눈을 피해 글 배우기에 여념이 없지만, 어떤 꿈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다.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 ‘야마모토 중위’와 ‘마에다’ 하사, 돈으로 팔려 온 어린 신부 ‘부근’과 ‘맹포수’는 늑대들의 하울링과 칼바람을 피해 작은 객점으로 몰려오고, 객점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연극 <낮은 칼바람>이 5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관객을 찾아왔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은 힘겹게 그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애환을 서부극의 형태로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 극성이던 코로나로 인해 공연 기록만 남기고 종료되었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찾아온 이번 공연은 오는 11월 26일까지 대학로 여행자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연극 <낮은 칼바람>은 많은 부분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을 떠올리게 만든다. 눈보라를 피해 객점, 혹은 산장으로 모여든 사람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된 서스펜스. 인물 각자가 지닌 비밀과 반전에 이르기까지. 극의 전반적인 구성에서 두 작품은 참 많이 닮아 있다. 허나 서로 다른 속내를 지닌 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긴장감과 서부극 특유의 장르적 쾌감에 집중한 <헤이트풀8>과 달리 <낮은 칼바람>은 그런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관심 없는 것들을 연극에서 들어내는 순간 그 안의 ‘사람들’이 드러난다.


이야기 속에 조심스레 스며든 작가 개인의 가족사 때문일까. <낮은 칼바람>은 격랑의 시대를 배경으로 설정해 두고도, 정작 포커스는 각자가 지닌 작은 이야기들에 맞춰져 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 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담담히 조명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했고, 포부(꿈)가 무엇이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누구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 극중 복녀가 동요 ‘반달’의 특정 소절을 반복해서 불렀던 건 어쩌면 현실에 갇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당시 민초들에 대한 은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서부극 하면 떠오르는 일련의 장면들이 있다. 악당에 의해 시달리는 선량한 마을 사람들. 그런 악당 앞에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는 카우보이, 혹은 보안관. 권총 대결 등등.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서부극은 기본적으로 선악의 구분이 뚜렷한 장르라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다. 서부극의 재미는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악당을 응징하는 과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서부극의 하위 장르인 만주 웨스턴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만주 웨스턴의 경우 시대적인 특성상 독립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있었던 만큼 주인공은 독립군, 악당은 일본군이라는 고정적인 역할이 주어졌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렇다면 <낮은 칼바람>은 어떨까. <낮은 칼바람> 역시 기본적으로 서부극을 표방한다. 허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여기서는 인물들을 명확하게 선악으로 구분해놓지 않는다. 


극 중에는 총 아홉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조선인이 일곱, 나머지 둘은 일본인이다. 일반적인 만주 웨스턴의 흐름대로라면 일본인 두 명이 악당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농업기사로 위장한 일본 군인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만주 현지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둘 중 대장 역할의 야마모토 중위는 관객들이 불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내선일체,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주장하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허나 관객들은 그런 그를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야마모토 중위는 극중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통틀어 가장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금복에게 따뜻하게 대하며 그에게 글을 가르쳐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고, 복녀와 부근에겐 노래를 가르치며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에서 웃음을 찾아주기도 했다(물론 이는 성공적인 첩보 작전을 위한 계략일 수도 있다).


조선인들 또한 마냥 선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객점 주인인 용막은 걸핏하면 금석에게 폭언과 폭행을 저질렀고, 심지어 수염은 어린 복녀를 희롱하였다. 종수의 경우엔 마적단 출신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나마 믿을만한 인물로 맹포수가 등장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린 부근을 용막에게 신부로 팔아넘기려 했다. 



그렇다면 <낮은 칼바람>이 편한 공식을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이건 결국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도 누군가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속에서 마냥 사람 좋아 보이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목숨을 바쳐 구했던 아이를 성인이 된 후에도 기일 때마다 불렀던 이유가 괴로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마음 한구석에 적당한 크기의 선의와 딱 그만큼의 악의를 동시에 품고 산다.


누군가의 본성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제국주의자도 누군가에겐 은인이 될 수 있고, 나라 잃은 억울한 백성도 어떤 이에겐 파렴치한이 될 수 있다. 그럼 우린 대관절 무엇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행동을 보면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의 선악을 결정하는 건 본성이 아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가 내린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이뤄진 게 곧 그 사람의 삶이다.


실제로 극 중 어른들은 하나같이 금석에게 선택을 강조했다. 종수는 금석에게 과거 용막이 그랬던 것처럼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그만두고 중국으로 귀화하여 새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 제안했다. 맹포수는 자신에게 살가웠던 야마모토 중위가 사실은 일본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에 갈팡질팡하는 금석에게 권총을 건네며 아무도 믿지 말고 반드시 너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 강요 아닌 강요들을 말미암아 금석은 마침내 미뤄왔던 선택을 내렸다.



탕. 탕. 탕. 밖에서 세 번의 총소리가 들린 후, 누군가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금석은 그 누군가의 얼굴에서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엿본다. 이제 그에겐 두 번째 선택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떤 이는 그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고, 다른 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금석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삶은 이제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일까. 그 힌트는 오는 26일까지 대학로 여행자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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