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것들을 위한 시계
다시 짐을 쌌다. 휴식은 끝났다. 몸 상태는 제법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여전히 조심해야겠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일상으로 돌아갈 차례다.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은 새로운 꿈과 다시없을 생애 마지막 여름방학의 추억을 뒤로하고 서울행 차량에 몸을 실었다.
스무 살 이후로 거의 매년 이사를 다니던 현대판 노마드로서,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이 되었건만 짐을 싸는 과정은 여전히 번거롭고 귀찮다. 필요한 리스트를 만들고 각각의 물건들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6개의 상자에 나눠 담았다. 그러다 발견한 게 시계였다. 검은색 시계줄로 장식한 SEIKO 손목시계. 10년 전, 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몇 년 전 배터리가 다 되어 고치러 가야 했는데 다짐만 하다 까먹어 버렸다. 그 사이 시계 위엔 먼지가 옅게 쌓였다. 시계줄도 갈라져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바로 다음날에 시계방으로 향했다. 수리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시계에 대해 생각했다. 10년 전 수능을 치르고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이 시계를 선물했다. 시간이 흘러 동생들이 수능을 보고 왔을 때도 아버지는 시계를 선물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 나름대로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당신의 자식들을 위한 당신 나름의 축복, 당부, 사랑. 그런 게 아니었을까.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정해진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그게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 시간을 소유하고, 그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과 아이의 차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어린 시절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건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몫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아침 7시엔 일어나야 하고, 늦어도 오전 9시까지 학교에 가야 했다. 친구랑 재밌게 놀고 있더라도 저녁 6시 전엔 귀가해야 했고, 밤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허나 어른이 되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단적으로 대학생만 되더라도, 초중고와 달리 내 시간표를 스스로 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내 시간의 주인으로서 온전한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의미는 대중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떠올려 보자. 이 영화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별종 아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능력 때문에 아이들은 괴물들로부터 사냥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미스 페레그린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의해 가장 완벽한 하루를 골라 루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아이들과 살아갔다. 미스 페레그린이 만든 루프 속에서 아이들은 괴물에 잡아먹힐 걱정 없이, 나이도 먹지 않은 채 영원한 하루를 반복했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었다. 루프를 유지하기 위해 미스 페레그린은 아이들을 꼼꼼히 통제했다. 아이들의 24시간은 정해진 일과표대로, 미스 페레그린의 지시와 허락 하에서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론 일당이 미스 페레그린을 납치하면서 아이들의 평화는 깨어졌다. 아이들을 지켜주던 루프는 사라졌고, 아이들은 괴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성장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루프가 깨지면서 시간의 흐름에 노출된 아이들은 하루하루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자신들에게 지시를 내려줄 미스 페레그린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함께 토론하여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세웠다. 나아가 그로 말미암은 선택을 바탕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배를 띄웠고 미스 페레그린 또한 성공적으로 구출할 수 있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 역시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성인이 된 날, 주인공 ‘팀’은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남자들이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비밀을 전해 들었다. 그때부터 팀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팀에게 일종의 시계를 선물한 것이다. 그날 이후 팀은 자신의 능력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일은 아니더라도 시간을 돌려 얻은 기회로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잡고, 대신 그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던 다른 선택들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 그렇게 팀은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났다.
Under the sea, under the sea
바다밑에서, 바다밑에서
Darling it's better down where it's wetter
바다 밑 세상이 더 좋고, 더 물기가 많아
Take it from me
내 말을 믿어
Up on the shore they work all day
저 물 위에선 하루종일 일한다고
Out in the sun they slave away
태양 아래서 뼈 빠지게
While we're devoting full time to floating
하지만 우린 항상 헤엄이나 치고 다니잖아
Under the sea.
여기 바다 밑에선
영화 <인어공주>의 OST인 “Under the Sea”는 발매된 지 30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회자되는 명곡이다. 하지만 가사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던가? 발랄하고 신나는 멜로디와 달리 “Under the Sea”의 가사는 왕자를 찾아 뭍으로 가고픈 에리얼에게 지상은 가혹하니 평화롭고 안전한 바다 밑에 머무르라고 설득하는 내용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얼은 자신의 사랑을 찾아 뭍으로 떠났다. 그것이야말로 어린 것들이 지닌 특권이자 본능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에서도 기상천외한 모험을 끝낸 아이들이 직접 배를 몰고 먼바다로 향하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아이들과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와 작별을 고한 팀이 난생처음 아버지가 없는 시간선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각각의 장면들을 돌이키다 보니 그제야 주인공들의 곁에 있던 어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몰랐던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에리얼을 설득하던 세바스찬의, 아이들의 항해를 지켜보던 미스 페레그린의, 팀과 마지막 포옹을 나눈 아버지 제임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며칠 후면 성인이 될 아들에게 시계를 건넸던 10년 전 내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시계를 고치고 돌아가는 길, 저녁 하늘이 노랗다. 여름의 끝을 알리듯 저녁 공기는 낮과 다르게 서늘했다. 지금 내 오른 손목에는 아버지가 선물한 시계가 채워져 있다. 먼지도 깨끗하게 닦았고, 몇 년 간 멈춰 있던 바늘도 다시 힘차게 스텝을 밟았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기묘한 감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나 그 감각이야말로 어린 것들의 특권이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째깍째깍. 그동안 멈춰있던 내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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