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도서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는 어느 날 갑자기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언뜻 들으면 어디 웹소설 사이트에서 연재되고 있는 소설 같은데 재밌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다. 저자의 실제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다. 추천평을 쓴 누군가의 말마따나 소설도 이렇게 쓰면 과장이 심하다며 욕을 먹는다는데. 책 소개를 보자마자 호기심이 마구 솟구쳤다. 이 히키코모리는 대관절 누구일까.
저자 ‘사이토 뎃초’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 20대 시절을 우울하게 보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의 캠퍼스 라이프는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동아리에서 만난 첫사랑과도 끝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4년을 버텼지만 이번엔 취업 실패가 그를 때려눕혔다. 잇따른 실패의 경험은 어린 청년의 내면을 손쉽게 망가뜨렸다. 결국 사이토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굳게 닫힌 방 안에서 사이토의 시간은 어둠을 먹고 무섭게 증식했다. 망가진 시간 감각은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이토가 의지한 건 영화였다. 남아도는 시간을 달래기 위해, 부모님에겐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고, 닥치는 대로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루마니아의 영화 <경찰, 형용사>를 보았고, 마치 운명처럼 루마니아어와 사랑에 빠졌다. 이윽고 그는 홀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에겐 언어 재능이 있었고(적어도 내가 볼 땐 그렇다), 대충 루마니아어를 읽고 쓸 줄 알게 되자 사이토는 인터넷 속에서 루마니아인들과 교류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들에게 자신이 예전에 쓴 단편 소설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를 말미암아 이제는 루마니아의 일본인 출신 작가가 되었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긴 했는데 대충 훑어만 봐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아 반가운 기분도 있었다. 히키코모리까진 아니었지만 밖에 나가는 걸 끝내주게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몸이 아파 한동안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도 같았다(저자는 크론병, 내 경우엔 허리디스크였다). 음대 입시 실패 이후 도피처로 영화를 선택했고, 영화를 보다 보니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당시 나는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는 수다다>라는 코너에 빠져 있었고, 그를 따라 영화에 대한 짤막한 평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직업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이외에도 나를 사로잡은 것에는 좋아하는 것을 향한 저자의 애정도 있었다. 이 책은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여정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자신이 루마니아어와 루마니아의 문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는 일에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내내 소리치고 있다. ‘루마니아 영화에 빠져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애초에 가르쳐 줄 사람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중국어처럼 원어민이 많은 것도, 영어처럼 언어를 공부한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사이토는 언어를 스스로 공부했다. 루마니아어 교재를 구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고, SNS를 통해 루마니아인들과 친구를 맺고 직접 소통했다. 작가가 된 이후에는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보다 10살이나 어린 고등학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거절당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루마니아 문예지에 끊임없이 투고했다. 정말 대단한 에너지였다. 앞에 대학 생활 적응에 실패해서, 사랑에 실패해서, 취업에 실패해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다는 사람과 같은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사이토 본인도 이를 의식했는지 독자들이 자신을 두고 ‘당신 정말 히키코모리 맞아?’라는 의심을 할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내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 <김씨표류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여자 김씨’는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3년 후, 한때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로 가득했던 그녀의 방은 각종 쓰레기와 새까만 어둠이 점령했다. 태양의 자리는 컴퓨터 화면의 새파란 불빛이 차지했다. 그리고 그 앞에 떠 있는 새하얀 얼굴. 밥 대신 방 안의 어둠을 먹고 자란 듯 새하얗고 깡마른 여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히키코모리’ 하면 떠올리는 일련의 이미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울타리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가 납득하지 못했을 뿐, 영화 <김씨표류기> 속 ‘여자 김씨’는 나름대로 일과표를 짜고 거기에 맞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는 것을 ‘출근’이라 불렀고 자신의 미니홈피를 꾸미는 것을 일종의 자기계발이자 직장 생활처럼 여겼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제자리걸음으로 만보를 채우는 등 자기관리에도 성실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바깥의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게 조금은 비틀린 형태로, 모든 게 방 안에서 이뤄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용기였고, 세상 밖으로 등을 떠밀어줄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그 존재가 ‘남자 김씨’로 표현되었다. 우연히 발견한 ‘남자 김씨’가 그녀로 하여금 세상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고, 세상과 대화를 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떼게 만들었다. 그런데 대관절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냐고? ‘남자 김씨’ 같은 존재들을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에서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는 내면의 상처와 두려움을 루마니아어로 극복하고,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성공한 주인공의 의지와 노력에 감탄하며,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기대하며 이 에세이를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의 사이토가 있기까지는 그의 용기뿐만 아니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를 세상 밖으로 떠밀어준 사람들의 공로도 있었다. 히키코모리가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아들을 지지해 준 부모님과 갑작스러운 친구 요청에도 친절하게 응답해 주었던 익명의 루마니아인들. 사이토가 쓴 단편소설을 루마니아 문예지에 보내 그가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랄루카씨와 언제나 솔직한 비평으로 그가 더 나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이끄는 요바넬씨. 엄하지만 진심을 다해 가르침을 주는 고등학생 스승 키라군과 루마니아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준 스미야씨까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닭이 동시에 함께 알을 쪼아 깨뜨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는 내가 이제껏 밟아온 걸음과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니 잊지 말자. 당신은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런 당신을 여전히 걱정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삶을 사는 히키코모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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