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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Dec 08. 2024

[Review] 마법을 걷어낼 시간

도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동화에는 마법이 있다. 그 마법은 공주를 잠에 빠뜨리거나, 왕자를 개구리로 만들어 버린다. 신데렐라를 무도회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렇듯 동화는 마법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며 각자의 어린 시절을 장식했다. 그렇기에 만약 인간의 기억을 퀼트로 만든다면 그중 한 부분은 분명히 동화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을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발돋음한 동화는 오늘날 다양한 콘텐츠들의 원형이 되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예쁜 공주와 잘생긴 왕자가 등장하는 디즈니의 영화를 보고, 공주를 구하기 위해 거대한 용과 맞서 싸우는 게임을 즐긴다. 이렇듯 동화와 그것이 지닌 마법은 우리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동화의 가 보여주는 마법이 단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아름답기만 할까. 혹은 야수가 된 왕자의 저주를 풀어주는 사랑의 힘처럼 낭만적이기만 할까.  



도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우리가 어린 시절 보았던 ‘백설공주’, ‘피리 부는 사나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동화 속에 숨겨진 실제 역사 속 현실을 조명한다. 일례로 ‘백설공주’의 왕자님은 우연히 숲을 지나다 유리관 속의 백설공주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속 왕자님 역시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소문을 듣고 미녀가 잠든 성으로 향한다. 높으신 왕자님들은 어째서 편안한 왕궁에 있지 않고, 그것도 홀로 떠돌고 있던 걸까.


이 책에 따르면 중세 시대 유럽은 봉건제 기반의 연방 국가였기 때문에 왕의 자리를 잇지 못한 왕자들은 각자 영지를 받아 공작, 백작, 자작 등으로 불리며 영주가 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눠줄 땅이 많은 큰 나라에서나 가능했지 옛 독일처럼(한때 독일은 300개가 넘는 왕국/공국들로 쪼개져 있었다) 작은 나라들은 영지로 나눠줄 만한 땅이 충분치 않았기에 왕위 계승에 실패한 왕자들은 각자의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왕국을 떠나 세상을 유랑했다. 부모의 도움으로 성직자가 되거나, 떠돌이 기사가 되어 용맹함을 알리거나, 그러다 운이 좋으면 이웃나라의 사위가 되어 다시 왕이 될 기회를 잡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왜 숲속에서 길을 잃으면 괴물과 마주치게 될까>였다. 작가에 따르면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를 소우주와 대우주로 구분했다고 한다. 자신의 집, 혹은 목책이나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도시는 안전한 소우주였고, 그 너머의 외부 세계는 대우주였다. 중세인들은 대우주에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이 살고 있고, 천재지변, 질병, 흉작, 기근 같은 것들이 대우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그곳은 신이 기거하는 곳이자 늑대 인간, 마녀, 악령 같은 괴물들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마을 밖의 숲 역시 인간과 다른 것들이 사는 대우주의 영역이었다. 중세인들은 대우주를 두려워했고, 소우주 안에서 꺼림칙하거나 두려운 대상이 생기면 마을 밖으로 몰아내곤 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동화가 <헨젤과 그레텔>이다. 이야기 속에서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는 먹을 것이 떨어지자 남매를 ‘숲’에 유기했고, 길을 잃은 아이들은 숲속을 떠돌다 ‘마녀’의 과자집을 발견했다. <빨간 모자> 이야기 역시 심부름을 가던 빨간 모자가 숲속에서 늑대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두 동화 모두 중세인들이 대우주(숲속)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선입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중세인들이 믿었던 늑대 인간, 마녀, 악령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황된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가 숲에서 마주했던 마녀와 늑대는 과연 누구였을까.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나 숲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대우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는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자는 ‘평화살상형’에 처해졌다. 평화살상형은 형벌을 선고받은 사람을 누가 죽이더라도 죄를 묻지 않는 형벌이다. 그리고 이 벌을 받은 사람을 ‘바르구스(Wargus)’라 불렀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늑대라는 뜻이다. 마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번 마녀로 몰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공동체 안에서 살 수가 없었다. 마녀로 몰린 여자들은 마을을 벗어나 숲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 텃밭을 가꾸거나 약초를 캐며 홀로 살았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동화 속에서 본 늑대 인간과 마녀의 실체다. 어쩌면 그들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약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부족했던 중세 시대에는 천재지변이나 흉작, 질병 등이 돌면 그 원인을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대우주에서 찾았다. 이를테면 숲속의 마녀가 저주를 내렸다는 식이다. 그렇기에 대우주의 존재들은 오랫동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가 공포를 낳았고, 공포는 혐오를 낳는다. 중세 시대의 신학자이자 법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도 이렇게 말했다. “증오는 두려움의 자식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의 진짜 교훈이 아닐까.


그리고 이 교훈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몇 년 간, 서구 사회에서 급증했던 아시안 혐오 범죄에는‘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으로 작용했다(우리 사회 역시 같은 이유로 중국에 대한 혐오 정서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2018년 예멘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을 당시, 전국적으로 촉발되었던 반이슬람 시위와 난민 유입 반대 시위 역시 테러나 외국인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배후에 존재했다. 혐오의 대상이 마녀나 늑대 인간에서 보다 현실적인 존재들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 


흔히들 ‘역사’하면 먼지가 내려앉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옛 서적 같은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속의 역사는 위의 사례처럼 우리가 아는 동화를 만나 친근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이 지닌 엄숙주의나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이야기와 캐릭터(사람)가 있다. 재미와 추억이 어려 있다.


예술로서 동화는 현실을 모방한다. 그렇기에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실제 세상은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적 사고로 간단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의 역할은 특별하다. 동화의 마법을 걷어내고 세상을 보다 어른스럽게 바라보는 법을 알려준다. 모든 것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해피 엔딩보다는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다른 이야기를 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세상을 열 수 있다. 책의 서문에 적힌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천년 전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알았고,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으며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를 배웠다. 이번엔 우리 차례다. 천년 전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떻게 읽힐까. 그로 인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세상의 문을 열게 될까. 새로운 챕터가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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