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은 나의 힘
근 1년 만의 브런치 글. 2023년을 시작하며 잡은 원대한 목표 중 <브런치에 정기적으로 글쓰기>가 있었건만 3월이 되어서야 이렇게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놀랍게도 나를 움직이게 한 건 '올해 첫 원대한 실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불합격을 했고 이 경험을 글로 남기려 한다. 이렇게 하는 데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미래의 나를 위한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예전부터 나는 질투와 실패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왔다. 한 번 미끄러질 때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속에 불꽃을 피웠다. 심지를 태우며 하루하루 칼날을 가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아니, 좋은 쪽에 가깝다. "허허 이거 참. 내가 성공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구먼!" 외치면서 더 열심히 살아보는 거다. 효율 좋은 연료가 되어준 건 대부분, 성공보단 실패였다.
두 번째, 미래의 나를 위해 일종의 귀여운 실패담을 남기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 내가, 이날의 기록을 보며 "아, 이땐 그랬지!" 하며 추억하면 좋지 않은가. 만약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세상 사람들, 저도 이렇게 실패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러니 기죽지 말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금상첨화다. 사실 후자 쪽을 격하게 노리고 있다. 수년 후 어엿한 사회 중심?이 된 나란 MZ가 알파 세대에게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란 진부하고도 아름다운 메시지를 날리는 미래라니. 제법 짜릿해요.
세 번째, 나는 에디터니까. 나는 나에게 고용된 어엿한 에디터다! 비록 디에디트 에디터는 아니지만 주제zooje 소속 에디터다! 그리하여 난 내 경험을 콘텐츠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글을 시작으로 쭈욱, 더 다양한 글을 써 내려갈 것을 엄숙하고 뽀짝하게 선언합니다.)
2월 17일 금요일, 새 직장에 다닌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렇다! 2023년이 되자마자 구직에 힘을 쏟은 나는 2월을 나름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
평소 모르는 번호는커녕 아는 번호도 잘 받지 않는 나는 그날따라 그 전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전화번호 뒤엔 이름이 함께 표기되고 있었는데, 사실 난 그런 걸 처음 봐서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지구평평설은 사실입니다'란 말을 들었어도 이보단 덜 놀랐을 것 같다. 목소리도 2023년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이상하게 냈다. 설날 연휴, 열심히 디에디트 지원서를 작성해 지원한 것이 어언... 언제냐 이리도 까마득할 무렵, 갑작스러운 면접 전화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잔잔했던 호수에 운석이 콰광! 떨어진 느낌!
한편으론 불행했고, 한편으론 기뻤다. 불행은 익숙한 불안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새로운 집단에의 소속을 위해 지원을 할 때면 난 언제부턴가 '어차피 떨어질 것 같다'는 마음을 품었다. 자신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되뇌는 '할 수 있다'와 대립각을 세우는 감정이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엄습하는 그 녀석은 어쩔 수가 없다. 그저 무게추가 긍정으로 기울도록 노력할 수밖에.
기뻤던 건 당연히, 그래도 그간의 내 활동이 '에디터다움'으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나왔다. 나는 이커머스 기업에서 얼떨결에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당시의 업무는 기획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단순 제작에 가까웠다. 이후 퇴사해 다른 회사에서 웹진다운 웹진을 만들며 글다운 글을 썼고, 이 일이 '재밌다!'고 자주 생각했다. 올해 1월부터도 한 독립 웹진 소속이 되어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촘촘하진 않았어도 얼기설기 나만의 템포로, 에디터로 향하던 궤적이 마침내 인정받았네 싶었다. (떨어진 마당에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서류 합격만으로도 이 '인정' 단계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느꼈다.
그 다음주 수요일인 22일, 저녁 8시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 면접을 위해 바꾼 일정은 무려 3가지인데 둘은 친구들과의 약속이었고 하나는 남의집(올 초부터 진행 중인 커뮤니티 호스트 활동 링크)이었다. 심지어 정확히 22일에 나는 남의집 신청을 열어두고 있었다. 이미 신청한 분께는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개인 사정으로 일정이 취소되었음을 알렸다. (다시 한번 죄송... 꼭 다시 뵙길 바라는 마음 거듭 전했으니 진심이 닿았길.)
성수 초초초 역세권에 위치한 오피스. 나는 중요한 약속을 앞두면 늘 미리 가 있는 습관이 있기에(안그럼 늦음.) 업무를 마치고 약 7시에 성수에 도착했다. 도보 5분 거리에 어니언이 있었는데 마침 자리가 있길래 소금빵과 커피를 시키고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괜히 이것저것 예상 질문을 뒤적였으나 떨리는 마음 + 이젠 될 대로 되라 식의 마인드가 휘몰아쳐서 크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이윽고 8시에 딱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커튼을 젖히자 유튜브에서 보던 익숙한 세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마 모두에게 익숙할 준셀럽 에디터 세 분께서 반겨주셨다. 연예인 영접 느낌.
첫인상
우선 에디터 M, H 두 분 모두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를 벗고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꽤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엔 신기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두분 모두 영상 속 목소리 톤을 그대로 가지고 계셔서 놀라웠다. 이것 또한 당연한 일일 수 있으나, 상당수의 연예인(ex. 유재석)이 방송용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축에 속한다고 본다. 카메라가 꺼져있어도 같은 텐션을 유지하신다는 거니까. 과연 후로다, 후로.
그리고 가운데에 에디터 B님이 계셨다. 사실 난 에디터 B님에게 평소 큰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에 주접을 떨고 싶었으나, 요즘 바닥 친 E 에너지 + 면접 자리에서 얼어버리는 나의 자아 덕에(?) 내내 차분함을 유지했다.
(B님에게 유독 친밀감을 느끼는 건 나와 소비 패턴 및 취향이 비슷하다고 여겨져서다. 우선 영화를 정말 많이 보셨고 좋아하시는 것. 내 위시템인 펄프픽션 포스터와 윌슨 배구공을 보유하셨다는 것. 반가사유상과 인센스 홀더 같은 일명 '쓸없템'에 진심이시라는 것. B님의 키보드 소개 영상을 보고 첫 키보드를 장만하기도 했다. 일종의 손민수. 디에디트에서도 B님의 아티클은 꼭 챙겨보고 개인적으로 발행하시는 뉴스레터 낫뱃다이너도 구독한다. 솔직히 더 얘기할 수 있는데 너무 열성 덕후 같으니 그만하겠다.)
면접 내용
떨어진 마당에 너무 자세히 회상하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하 면접은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질문을 적는 것으로 요약하겠다. (+ 결과 발표 이전에 이미 충분히, 아니 넘치게 회상 타임을 가졌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회상은 네이버다.)
1. 좋아하는 브랜드 5가지와 그 이유는?
2. 전직장에서 왜 퇴사했나요? 직장에서의 캐릭터는 어땠어요?
3. 사람들이 보통 나를 어떻게 묘사하나요?
4. 제출한 기획안에 유독 oo을 주제로 한 게 많은데 특별히 이유가 있나요? 자신이 있나요?
5. 만약 자동차 관련 아티클을 맡게 된다면 무엇부터 할 건가요?
6. 제출한 기사의 형식을 이런 식으로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 만약 이번 주에 발행되는 까탈로그 에 소개될 2가지 아이템을 낸다면? (이건 솔직히 예상하고 준비했는데 그 주 금요일 실제 발행된 레터를 읽으며 내가 한참 수준 미달의 아이템을 자신 있게 말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에디터 세분에 대한 존경심이 하늘로 치솟았음. 이렇게 다채로운 소식을 수집하고 공유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시는 걸까... <클래스가 다르다>)
8. 돈과 명예 중 하나를 고른다면? (B님의 질문이었는데 정말 B님 답다고 생각했고 H님이 웃참하셨다. 내 짐작으론 아마 B님만의 공식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었고 난 당연히 명예를 골랐다. 재밌는 건 이 대답을 하면서, 예전에 에디터 M, H 두 분이 토스와의 인터뷰 중 '둘 다 돈보다는 명예를 선택하는 타입'이라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9. 디에디트를 친구에게 소개한다면? (대답을 너무 정직하게 해서 M님이 "되게 챗GPT처럼 우릴 소개해주셨다"고 웃으셨다...)
10. 디에디트 웹진에서 다루는 토픽 중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11. 어느 카테고리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지?
12. 당장 글을 발행하는 게 아니라 여러 서포트 업무를 하고 배우게 될 텐데 알고 있는지? (암요 암요!)
13. 웹진과 뉴스레터, 종이 매거진 등 자주 읽는 매체를 말해달라.
14. 작년에 있었던 디에디트 객원 에디터 모집엔 왜 지원을 안했나.
15. 평소 결과와 과정 중 어떤 걸 중시하는 편인지.
16. 성격이 급한 편인지, 느긋한 편인지.
위 리스트는 진행 순서와 무관하며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임을 밝힙니다. 질문은 더 많았고 면접은 장장 한시간이 조금 넘게 진행되었다. 보고 나오고서 느낌은 일단 다리가 아프다는 것(긴장한 탓에 앉아서 까치발을 한 기괴한 자세로 면접을 봤다). 또 수고한 나에게 빨리 상을 줘야겠다는 생각(바로 위스키 마시러 감). 면접은 상대적이니 내가 못 보진 않았지만 더 잘 본 친구(더 똑쟁이거나 지금 디에디트가 필요한 캐릭터에 더 잘 맞거나)가 있다면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붙을 만한 이유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잘한 대답도 제법 있었고 분위기도 괜찮았다.
하지만 떨어졌다.
오늘 오후 7시 30분쯤, 업무를 마치고 쇼파에 앉아 봄맞이 패브릭 커튼과 침구류를 고르고 있던 나에게 문자가 하나 왔다. 합격 발표도 운석 같았는데 마치 수미상관이라도 이루는 듯했다. 이번엔 초원에 한가로이 누워있다가 운석 맞은(?) 느낌이었다.
쿨한 척했지만 한 1분간 속이 쓰렸다.
다행히 나는 지난주에 이미 불합격의 기운을 어느 정도 감지한 상태였다. 연락이 늦어진다는 건 갈등이 있다는 것이고 내가 최종 선상이 있다고 한들, 내가 강력하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열심히 불행 회로를 돌렸다. 어기영차. 회로가 너무 열심히 돌아간 나머지 방전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난주에 머리로 열심히 광탈 시뮬레이션을 돌린 덕에 타격이 크지 않았다.
동시에 문득 떠오른 문장은,
떨어지는 게 진짜 별거 아니더라. 그래도 성인으로 10년 가까이 살아보니 이거 하난 알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내 위치에서 원래 하던 거, 더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실패를 동력으로 삼으면서. 침착맨 구독자답게 '오히려 좋아'를 외치면서.
나는 지원을 할 때조차 떨어질 때 겪을 슬픔을 우려해 망설이는 쫄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를 되뇌며 용기를 냈다. '혹시'하는 마음은 '역시나'로 부서졌지만 나는 늘 그래왔듯 그 잔해 속에서 다른 성취를 꽃 피울 것이다. 쫄보의 마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디에디트의 세 에디터분께 나는 영영 모르는 이로 남았을 터. 그러나 고맙게도 용기가 불안을 이겨준 덕에 오늘 이렇게 난 기억에 남을 지원자가 되었다.
이 부서짐은 또 어디로 날 데려갈까. 어떤 성취가 날 기다릴까.
지금의 아픈 설렘이 결국 내일의 날 만들리라.
더 열심히 생각하고 쓰고 만들고 알려야지.
나는 에디터니까!
어제보다 더 강해진 에디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