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공생, 로스쿨에 도전하다 (0)
졸업하면 뭐할거냐고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하면, 가장 흔히 보이는 반응이 "네가 왜?" 였다. 왜냐하면 나는 천생 이과였고, 개발자로도 만족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고-컴공-IT회사 테크를 착실히 밟아와 놓고서는 갑자기 문과 테크의 정점처럼 보이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납득하기는 어려울 만하다.
첫 번째 반응이 '의아함'이라면, 이후에는 두 가지로 양분된다. '존경'과 '우려'다. 존경은 사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지인 중 변호사가 있거나 로스쿨생 당사자거나 어쨌든 이 분야에 얽혀있는 사람일수록 이쪽 업계의 전망이 장기적으로도 좋을지는 모르겠다며 걱정의 목소리를 많이 공유해주었다.
이런 우려의 배경에는 사법고시가 폐지된 이후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음에도 발생하는 "리트 낭인" 등 불확실한 미래를 걸고 폐관수련하는 이미지도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정보를 찾기 위해 커뮤니티를 둘러보면 시험에 모든 걸 투자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내가 로스쿨 입시를 너무 가볍게 보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람은 대학 입시 준비할 때도 많았으니 꼭 로스쿨만의 문제는 아니다.
혹시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확실히 못박고 가자면, 로스쿨 입학이 나의 유일한 계획은 아니다. 떨어지면 아쉽겠지만 다시 개발자로 회귀해서 취업을 준비할 것이다. 물론 현재 가장 내가 높은 우선순위로 준비하고 있는게 로입이지만, 그걸 전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고 실제로 그러지 않고 있다. 나는 단지 로입 준비에 드는 비용이 감당할 만 했고, 변호사가 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 이 결정을 하게 되었다.
비용에 관하여
구체적인 로입 준비 과정에 대해서는 시리즈로 쭉 풀어낼 생각이지만, 조금만 찾아본다면 로스쿨 입시 정량 3요소로 학점, 토익(또는 다른 영어 성적), LEET(법학적성시험)을 꼽는다. (유학 등) 특별히 초고학점을 따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학교를 열심히 다녔어서 현재의 평점은 공대 치고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개발자 커리어에서는 사실 학점이 크게 중요한 눈치는 아니었어서 학점을 잘 활용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다가 찾은 대안이 로입이기도 했다. 토익은 나머지 2요소에 비해서는 비중이 적어서, P/F 커트라인은 넘었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LEET의 경우도 지식이 아닌 적성을 보는 시험이다 보니, 외울 게 많이 없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최소 지식은 수능보다도 훨씬 적을 것이다. 그래서 스터디카페에 틀어박혀서 시간만 주구장창 보낸다고 올라가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언어적 감을 어느정도는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대생 중에서는 (영어는 잘 못해도) 한국어 글은 잘 쓰는 편이라고도 자평했다. 수시가 중심인 과학고에서 어떤 추가 공부도 하지 않은 채 17수능 국어를 98점(2점은 중세국어) 받은 기억도 있다. 물론 연습이 충분히 된 문과생들과 경쟁하는 것은 녹록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발을 들일만한 자격은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들을 보다보면 오히려 이과생한테 유리한 과학기술 지문도 왕왕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시험만 잘 치면 로스쿨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정량이 아닌 정성 평가 요소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스펙이 많이 갖춰지지는 않긴 했지만, 어쨌든 '로스쿨에 지원하는 개발자'라는 테마로 할 얘기는 많다고 생각했다. 개발자로도 오랜 기간 열심히 살아왔고, 특히 법적인 리스크가 큰 스타트업에서 2년 정도 실무를 하면서 개발자가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철학도 구축했다. 내 인생 썰을 재밌게 풀어낼 자신은 있으니 면접때 말만 제대로 한다면 정성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은 없을 것이라 보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퇴직금이 있어서 아직 신분상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로스쿨 입시에 투자할 최소 비용 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손 안 벌리고도 충당할 수 있는 측면도 물론 고려되었다. 학원이든 인강이든 안 듣고 오직 독학으로만 LEET를 공부했기에 지금까지 들인 비용은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적성에 관하여
하지만 이과를 전공한 상태에서 법과 관련된 직종으로 변리사도 있고, 컴공 전공을 살려서 전문 자격을 취득하고 싶은거라면 정보처리 계열 기술사를 목표할 수도 있을텐데, 하다못해 이과인데 스펙 좋으면 의전원 갈 수도 있는건데, 왜 전공 맥락과 상관 없어보이는 변호사 자격을 따는지 여전히 궁금할 수도 있다. 물론 앞에 언급한 대안들 모두 가볍게 이야기하기에는 정말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분야고, 내가 잘 알아본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의견을 개진하기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혹시 관련자분이 있다면 그냥 어린 애가 잘 몰라서 주절주절하는 걸로 너그러이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생물학쪽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어서 의대는 어릴때부터 진작에 배제했던 직업 중 하나다. 비위가 약해서 사람 피 보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정보처리 관련 자격은 실무자 커리어에는 큰 의미는 없고 오히려 컨설턴트 커리어에 유리할 것 같은 인상이 있는데 실질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입으로만 멘토링하는 것을 업으로 삼기에는 흥미가 안 맞을 것 같았다. 변리사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공학(기계, 화학, 전기)쪽이면 모르겠는데 소프트웨어 업계에 있어서는 특허의 중요도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아서 딱히 희망하는 커리어가 아니었다.
변호사도 물론 사무적인 일만 하고 입으로만 떠든다는 일반적인 인상이 있긴 하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누구나 법에 저촉될 위험이 있는 일을 (몰라서라도) 하기 마련이다. 어릴 때부터 코딩을 좋아하다 보니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도 내 손으로 만든 서비스를 대중에게 배포한 경험이 있는데, 꼭 몇천만원을 벌거나 몇백만명이 쓰는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그냥 단순한 호의로 만든 소규모 서비스에서도 개인정보보호법, 저작권법, 전자상거래법 등의 위반 소지가 충분히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법적인 제약으로 인해 어린 마음에 사업을 접게 되는 모습을 종종 보다보니 법만 좀 잘 알았어도... 하는 아쉬움과 억울함이 마음 한 켠에 쌓여왔다. 이후 내가 다니는 스타트업에서도 상당히 치명적인 법률 이슈로 인해 서비스가 망하게 되어 소프트웨어와 법 양측을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으로 각성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한편, 앞에서도 언급했듯 나에게는 언어적 재능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아마 어릴 때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키보드 배틀을 열심히 한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며 상당히 복잡한 규칙을 세우고 적용하고 개정해보기까지 했었다. 물론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단순히 특정한 취미를 즐기고자 했던 회원들에게는 조금 가혹한, 너무 과한 중2병이 아니었나 싶기는 하지만 ㅎㅎ... 이게 내가 법학에 대한 '적성'을 증명하는 사례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사회의 복잡한 측면을 체계화된 글로 정리하는 연습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온 덕에 회사에 들어와서도 업무를 Notion이라는 툴로 잘 문서화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내가 법이라는 체계에 대해 최소한 흥미를 갖고 있다는 유의한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우려되는 점
물론 로스쿨과 내 성향이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무작정 외우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로스쿨 입학에 성공해 놓고 번아웃 와서 자퇴는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이후로 독서실형 공부는 질려버려서, 다시 그런 공부를 하라고 하면 순순히 하려나? 잘 모르겠다.
서울대를 나왔지만서도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도 크다. 자유 그 자체였던 스타트업 생활이 내 유일한 사회경력이라서, '양복을 입는' 직종이 과연 나에게 맞을까가 오히려 제일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인맥을 관리하거나 라인 정치 같은 걸 못하겠어서 그냥 내 실력을 갈고닦아 내 주변에 사람들이 먼저 찾아오게 만드는 게 지금까지의 내 사회생활 전략이었는데 이 업계에까지 그러기에는 쉽지 않을 듯하다. 개발자는 그래도 사람들이 대체로 순박하다는 인상이 있었지만....
의뢰인을 상대해야 되는 직업이라는 점도 신경은 쓰인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의뢰인을 상대하지 않는 서비스업이 뭐가 있겠냐만, 그리고 개발자도 결국 기획자나 기타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직업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잘 적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는데, 글이 아닌 말로 청산유수를 쏟아내며 상대방을 홀리는 그러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법정드라마에서 보이는 그런 대단한 변호사는 못 될 듯하다.
로스쿨 들어가서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하면 그다음에는 뭐 할 거냐고도 종종 질문을 받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뭔가 진로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대학 입학할 땐 내가 로스쿨 생각을 해볼지도 전혀 몰랐는데 3년 뒤 내 모습을 예상해 보는 게 의미가 있으려나. 다만 내가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고, 돈 더 벌자고 개발자 버리고 변호사 되려는 사람도 아니다. (더 벌면 좋지만, 그게 로준 목적 1순위는 아니다.) 판검사는 당기지 않고 빅펌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업무 강도가 심할 것 같다는 인상이다. 졸업 후 로펌에서 경험을 쌓고 IT회사 법무팀에서 근무하는 게 현 시점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커리어다. 바빠서 실제로 될진 모르겠지만 종종 법적 위기에 처한 지인들도 도와주는 상상도 해본다.
여기까지 읽어본 사람들은 아마 느끼겠지만 솔직히 로준에 그렇게 진지해 보이는 모양은 아니다. 태도가 매우 불손하다. 내가 만약 로스쿨생이 되고서 과거 글을 돌아본다면 부끄러워서 글을 파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개인정보 특정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 않는 한 가급적 글은 남기고 싶다. 로스쿨 지원 사유부터 이런데 실질적 준비과정은 얼마나 좌충우돌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앞으로 올라오는 글도 간식마냥 맛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