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21
먼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오랫동안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딸이 있거나 아들 혹은 둘 다가 있는 모양을 '가족'이라 생각했다. 여기에 처음으로 틈이 생겼던 건 중학생 때이다. 큰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날엔가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배 부르다, 힘들다, 덥다, 그렇게 가벼웠던 이야기가 어느새 가족으로까지 나아갔다. 각자가 이야기했던 가족은 <어느 가족>의 그것처럼 남남이 모인 모양은 아니었다. 아빠는 없고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동생과 함께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 부모님이 맨날 싸우더니 얼마 전에 이혼을 해서 자신의 처지가 아무래도 난감해졌다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었다.
각자가 꾸리는 가족의 모양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런 걸 조금도 상상해본 적 없던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속으로만 놀라워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족의 모양이 각자에게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가족은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나의 가족에게는 어떤 위기랄지, 사건이랄지, 그런 게 있었어도 나는 몰랐기 때문에, 기껏해야 나는 엄마 아빠가 부끄러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가족에 대한 내 나름의 솔직한 이야기였다.
이후 더 자라고 나서는, 가족이 꼭 피와 살과 DNA를 나누어야만 가능한 건 아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학생 때 슬며시 보았던 소설이라든지 영화를 통해 가족의 테두리를 생각했다.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 그런 것들 말이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미워해야겠다, 의심해야겠다. 그렇게 다짐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에게든 아무렇게나 상처를 내버리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내가 그것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실패하는 와중에 실패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려 애쓰는 내가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2018년 늦여름에 <어느 가족>을 보았다. 좋았다. 영화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내다 바친 순간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오사무와 쇼타가 널따란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서로에게 장난을 칠 때. 머리를 자른 스스로를 귀엽다고 말하는 린의 얼굴. 그런 린을 바라보던 아키. 보이지도 않는 폭죽의 소리를 올려다보던 어느 가족의 모습. 훌쩍 친해진 쇼타와 린이 매미 유충을 함께 응원하던 때. 손가락을 돌돌 만 뒤, 이마나 입술에 손등을 가져다 대던 순간들. 바다. 쇼타를 주운 곳이 어디였는지 말하던 노부요의 곧은 얼굴. 오사무가 쇼타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던 때. 결국은 허겁지겁 버스를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던 오사무.
이런 순간들에 마음이 아주 이상했다. 아마도 그들의 관계가 쉬이 흩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만약 어느 가족이 아주 오랫동안, 종종 갈등이 있더라도, 혹여 누군가 죽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있음을 문서로든 뭐로든 증명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존속이 가능할 관계였다면 나는 그 순간들에 그다지도 마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어느 가족>에는 ‘보통 가족’과는 다른 가족이 있다. 혈연으로는 조금도 이어져있지 않은 이들은 낮에는 각자의 삶을 꾸리다가 해가 지면 한 집에서 만나 함께 밥을 먹는다. 어떤 이유로 이들이 여기 모였는지, 함께 살게 되었는지, 영화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조금 언급되긴 하지만 조금일 따름이다. 어느 가족의 경위와 그 이유는 끝내 선명하지 않다. ‘그들이 이렇게 모이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내 빈약한 상상력을 <어느 가족>은 메꾸지 않는다.
이 ‘부연 없음’은 <어느 가족>의 커다란 줄기이다. 사건과 의도가 불분명할수록 그들이 꾸린 ‘가족’, 그 사이를 오가는 관계의 모양은 흐릿해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흔히 가족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관계, 존재하더라도 없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관계, 그것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이런 관계는 사건과 의도라는 테두리 바깥에도 무사히 존재했다.
<어느 가족>은 ‘가족’이라는 관념, 그것을 통째로 부수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결혼했던 사람에게 위자료를 받고 있다. 어느 가족의 일원들은 때때로 본인들이 꾸린 ‘가족’을 의심한다. 누군가는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라는 경찰에 질문에 '그러게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노부요의 얼굴도 역시, 가족이라는 관념 그 안에 있다. 그들은 피로 연결되지 않았을 뿐, 보통의 가족을 꿈꾸었고, 또 꾸릴 수 있다면 그러고자 했다.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는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관념이 지닌 어떤 정서만큼은 분명한 기반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가족>은 분명한 가족 영화다.
하지만 <어느 가족>은 '가족'에 대해 묻는다. 어쨌든,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자식' 린을 주우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결국 '누가 누구의 씨인지 정확히 아는 일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는 없다. (심지어 그들이 경찰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조차, 쫓고 쫓기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들이 ‘어느 가족’을 꾸린 것, 그 자체가 영화의 위기일 따름이다. 그들의 관계는 드러나는 순간부터 오해와 추측이 난무하다가 결국 부정될 것이다. 보통의 가족이 당연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짐작한다. 다소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어느 가족>의 속도와 무관하게 어떤 사건과 결말이 들이닥칠 것임을.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쌓아 올린 시간과 관계가 통째로 부정될 때,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된다. <어느 가족>을 지워내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던, 유달리 보통이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그래서, 그들이 꾸린 관계는 흩어지고 말았으니까 결국 실패인 걸까?
관계의 영원한 존속. 그것이 ‘가족’의 조건이자 관계의 성공이라면 ‘어느 가족’은 실패일 것이다. 하지만 린은 엄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때리는 것’이 거짓말인 세계를 린은 이제 알았다. 사랑은 오직 포옹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가족> 덕분이다. 가족이라는 게 너무 견고하고 단단해서, 도무지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었던 린은 이제 엄마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자그만 애가 고작해야 고개를 몇 번 저은 것뿐이다. 참 요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린은 엄마의 말에 (아마) 처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것을 거부하는 일. 그건 엄마와 혈연과 가족이 내 세계의 전부가 아닐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연립주택 복도에서 혼자 놀던 린이 너머를 바라보던 순간의 클로즈업. 영화의 마지막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장면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가족'이 설령 아주 흩어져버렸대도,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상처를 입었대도, 그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대도 그들은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믿게 되었다. 내 바람이 섞인 믿음이다. 하지만 린은 울타리 너머를 보았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보통의 가족', 그 울타리 너머에도 가족이 있다는 걸 안다. 설령 돈 때문에 구축된 관계더라도, 비단 돈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한다. 매끄러운 설명에 얼마나 많은 빈틈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아는 그들은, 비좁은 감옥 같은 장소에서 어쩌다 방황을 하게 되더라도 밖을 내다볼 것이다. 가족이 아니더래도 가족일 수 있는 무작위의 사람들이 지금 여기 바깥에 있으니까. 설령 임시에 불과하대도, 무너지려는 각자를 지탱하는 관계가 여기 말고 거기에도 존재하니까. 이런 건 실패일 수가 없다.
한 경찰이 쇼타에게 건넨 말은 사실이다. 집, 그러니까 ‘보통의 가족’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게 있다. 만남, 친구들과의 만남. 그건 ‘보통의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테두리 바깥의 어떤 만남은 <어느 가족> 일 수 있다.
혜정.
2018.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