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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몬 Nov 15. 2023

소박한 꿈을 꾸는 즐거운 여인의  어느 눈부신 여행

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햇살 좋은 날

짙은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간지러워 살며시 눈을 떴다. 폭닥하니 뽀송한 이불자락을 꼭 잡고 누운 채로 기지개를 쭉 켜자 바스락 소리가 온몸에 감겼다. 눈앞의 낯선 천장에 동실동실한 기분이 들어 몸을 일으키곤 창가로 다가가 실눈을 뜬 채 힘껏 커튼을 열어젖혔다. 밀려드는 태양빛에 찡그렸던 미간을 펴면서 서서히 눈을 뜨자 얼룩 한 점 없이 투명한 유리창 뒤로 새파란 하늘과 새하얗게 시린 만년설이 만나는 장관이 펼쳐졌다.


15년 전 그대로의 풍경을 보며 풋풋했던 신혼여행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시 스위스행 열차에서 만났던 한국인 가족이 너무 보기 좋아서 결혼 15주년 여행은 아이들 다 데리고 유럽여행하자고 했었는데. 남매와 함께하는 화목한 4인가족을 상상했었지만 우당탕탕 3형제와 함께하는 5인가족은 상상했던 이상으로 행복하다.


겨울 풍경을 봐서 그런가 반소매차림이 괜히 추운 것 같아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방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남편과 둘째가 장기를 두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아들을 이기고 싶은 남편의 진땀이 느껴져 놀려주려고 다가가는데, 내년에는 무려 3학년 형님이 되는 애교쟁이 막내가 맞은편 침실 문을 열고 나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콩'하는 심장의 떨림과 함께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밀린 볼살이 눈밑까지 접히는 게 느껴진다. 미운 네 살, 혼돈의 일곱 살을 지나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게 더 좋은 나이를 겪으면서도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에 대한 콩깍지는 벗겨질 줄을 모른다.


첫째를 깨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으아아~" 처절한 음색의 비명 아닌 비명이 들렸다. 남편이 손에 쥐고 있던 장기짝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양손으로 애꿎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아쉬움 반, 분함 반, 대견스러움 한 스푼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둘째는 못 이기겠다으아~!! 네가 이 아빠를 뛰어넘었구나!"

요즘 들어 부쩍 비슷한 절규가 자주 들려온다. 장하다 우리 아들. 5년 전 초1 시절 밤낮없이 '바다동물장기' 하자고 조르더니, 이제 진짜 장기에서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놀라운 집중력에 웬만한 어른은 가볍게 이긴다.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이 눈물과 함께 내려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호텔 수영장으로 향했다. 차가움이 손 끝에 닿을 듯 새파란 하늘 가득한 천장에서부터 둥글게 시선을 옮겨가며 풀로 들어서던 중 '첨벙' 입수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과 시원시원하게 수면을 가르는 스피드에 놀라고 슬쩍 보이는 다부진 몸매에 감탄하며 옆 레인에서 수경을 고쳐 쓰는데, 순식간에 50m를 건너온 그 남자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보는 이조차 자유를 느끼는 순간. (출처 : Unsplash)


화들짝 놀라 돌아보며 자세히 보니 5년 전에 내가 우리 집 잠꾸러기 일인자 타이틀을 내어준 후로 한 번도 그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첫째였다. 수경을 벗어 탈탈 털면서 씨익 웃는 표정이 능글맞다.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선수를 치다니, 앙큼한 녀석. 원빈과 고수를 헷갈려하는 나지만 이렇게 종종 내 아들도 한눈에 못 알아보는 건 좀 미안스럽긴 하다.


아들과 낯선 땅의 수영장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5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완주를 목표로 처음 나갔던 첫째의 수영대회에서 형용할 수 없이 가슴 벅찬 뭉클함과 열기를 느꼈었지. 운명인 듯, 수영이 나의 인생에 들어와 잠자고 있던 승부욕에 조용히 불을 지피며 심장박동이 빨라지던 그 느낌, 두 뺨에서부터 미간까지 열감이 퍼지며 살짝 어지럽던 그 느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무렵엔 어린 시절의 운동신경과 도파민을 다시 폭발시켜 줄 인생 운동을 찾으려 안달이 나 있었는데, 나날이 약해져만 가는 관절과 근육으로 괜히 몸만 더 망가질까 걱정하느라 좀처럼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갖가지 스포츠 종목으로 가득했던 위시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생존을 위해 재미없는 유산소와 근력운동만 숙제처럼 근근이 이어가니 어찌나 침울하던지.


5년이 지난 지금은 30대 때보다도 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활력이 넘치니 참으로 감사하다. <수학의정석> 집합명제 단원만 새까맣게 풀었던 것마냥 매번 자유형, 배영만 배우다 흐지부지 그만 두곤 했었던 20대가 까마득하다. 이제 자유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며 배회하다 지칠 일도,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갈증에 애탈 일도, 푸짐한 살들과 다시 만날 일도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매일 신명 나게 살다 보니 남편과 아이들까지 덩달아 즐거워졌고 우리가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던 '대충육아(때 되면 절로 크겠지)', '알아서 교육(공부는 지가 할 마음이 생겨야 하는 거니까)'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러니 슬초브런치프로젝트로 시작된 글쓰기, 긴 휴직 끝의 복직 시기와 맞물려 수영을 만난 건 내 인생의 로또급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겨울 주 3회 새벽수영 초급반에서 충동적으로 시작된 나의 작은 도전은 아들에게 당당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육아휴직 3년 만에 복직해서 회사에 다시 적응하고, 공부하고, 새로운 업무에 계속 도전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의 성장을 지지해 주고, 꾸준히 글을 쓰고,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나 참 열심히도 살았다.


체력에 부칠 때는(사실 꽤 많은 새벽에) 새벽수영을 그만두자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나와의 약속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버텼다. 내가 선택한 것이 늘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도 힘을 낸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몸소 알려주고 싶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꿈을 꿀 수 있다고,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 중 하나라고, 아이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제 안에 녹여가길 바랐다. 이런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중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8년 4분기 대결은 이번 여행에서 하기로 했었다. 첫째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자존심을 꽤 많이 걸었다. 마흔셋의 엄마도 이렇게나 노력하여 실력이 늘고 있다는 본보기가 되어주고픈 마음 반, 첫째에 대한 묘한 경쟁심이 나머지 반. 나태해지고픈 마음이 슬그머니 일 때면 거침없이 성장하는 첫째를 보며 의지를 다잡아왔는데 이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들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 좀 이상한가 했는데, 둘째에게 장기 일인자의 자리를 내어주고 충격에 빠진 남편을 보니 원래 그런 건가 보다. 아이가 나를 진정으로 넘어서는 순간은 최대한 늦게까지 아끼고 아껴두었다가 진하게 음미하고 싶은데.


두어 바퀴 몸을 풀고 스타트 준비를 하는데 유리창 너머에 남편과 두 아들이 열렬히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남편은 나, 아들들은 형의 승리를 간절히 바랐겠지. 이번 승부에는 5박 6일 '자유 여행권'과 '자유 게임권'이 부상으로 걸려 있었다. 첫째는 지역 수영대회에 나가면 꽤 좋은 성적을 거두는 실력자다. 동일 조건의 경주는 어불성설이고, 실질적 평등을 위해 나는 200m, 아들은 300m를 전력질주하여 승부를 겨뤘다.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내는 느낌에는 중독성이 있다. 아마도 도파민. (출처 : Unsplash)


경기 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만큼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알뜰하게 짜내어 녹초가 되었다. 얼굴이 새하얘진 것도 같았다. 첫째가 별로 안 힘들어 보이는 건 기분 탓으로 돌리면서도 은근히 흐뭇했다. 아무튼 남편아, 내가 해냈다. 내년 초 단둘이 떠날 진짜 결혼기념일 여행지와 항공편을 벌써부터 알아보며 주책맞게 즐거웠다. 작년에 만나지 못해 아쉬웠던 오로라를 보러 갈까? 막내는 형들이 잘 돌봐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융프라우를 오르는 길은 험난하지 않았다. 15년 전 고산병을 혹독하게 겪어본 남편이 아이들 핑계로 기차표를 미리 다 끊어놨다. 둘이 같이 타다가 아찔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이번에는 1인 1눈썰매를 야무지게 챙겼다. 기차를 타고 흥겹게 산을 오르며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장엄한 풍경을, 위대한 자연을 대하는 작은 인간의 경외심을 온몸에 담았다. 막내가 눈을 반짝이며 정말 궁금한 듯, 감탄인 듯 내뱉었다.

"산 위에서 저기 쌓인 눈에 떨어지면 푹신할까? 얼마만큼 구덩이가 파일까? 살 수 있을까?"

하하, 그거 엄마가 15년 전에 똑같이 궁금했던 건데.


"저기로 떨어지면 바닥이 없어서 계속계속 눈을 뚫고 떨어지다가 지구 반대편에서 나오는 거야."

둘째가 진지한 말투로 듣도 보도 못한 공상을 줄줄이 이어가는데, 막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도대체 어떻게 그게 되냐고 상세한 과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천연덕스럽게 양자역학까지 들먹이며 대답을 늘어놓는 둘째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막내를 보며 나머지 세 사람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장단을 맞춰주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


Jungfrau, Switzerland(출처:Unsplash)


산 정상에서 맛보는 신(辛) 컵라면은 변함없이 감동이었다.

우리 5년 후에 또 오자.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사진을 찍자.


#5년후의일기 #픽션 #꿈은이루어진다



+덧

이 글은 <슬초브런치프로젝트> 과제입니다. 바라는 모습을 상상하며 쓴 5년 후의 일기입니다. 미래일기를 써 보니 앞으로의 길에 대한 기대감이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밀어내고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네요.


건강하고 웃음 가득한 사랑스러운 가족, 뿌듯함을 느끼는 하루하루, 커다란 부를 얻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안정적인 경제력,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이어가며 감사하는 삶, 그리고 이 글에는 담지 못했지만 저와 남편이 각자의 자리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주도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나름의 재능과 경험을 기쁘게 나누며 인정도 받는 설정이 있습니다. 일욕심을 많이 내지는 못하고요,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는 소소한 시간들과 일상의 틈에서 찾는 한적함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이들이 닮고 싶은 부모, 든든한 부모가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꿈꾸어봅니다.


5년 후 겨울시즌에 결혼 15주년 가족 여행은 진심이고요, 수영은 12월에 시작합니다(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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