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에 깨달은 어릴 적 꿈의 소중함
오늘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해외에서 생활을 한다는 게, 매우 낯선 환경에서 매일매일 새로움의 연속인 삶을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새로움도 생활이 되어 버리는 순간 아주 익숙해진다. 생활이란 게 그런 거니까. 그렇게 모든 새로움이 생활이 되어버린 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어느 날 문득 우리 회사가 있는 빌딩의 정문을 나설 때였다. 일 년 내내 더운 날씨임에도 나는 항상 긴팔 셔츠를 입고 소매를 걷어 올리는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데, 백화점 다닐 때 처음 배운 게 반팔은 정장이 아니다 라는 패션 코드에 대한 일종의 '정언명령' 이 머리에 박힌 때문인지 세미 캐주얼로 입을 때도 긴팔을 계속 고수하던 참이다.
2년 좀 넘게 여기서 일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못해도 벌써 1,500번 이상은 이곳 정문을 드나든 셈이다. 그런데 이날 문득, 정문을 나서며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셔하면서 동료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문 밖으로 막 나서는데 뒤통수를 세 개 맞은 강렬한 느낌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갑자기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듯한 '유레카' 모먼트가 찾아왔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길가다가 문득 본 장면이 어디서 본 것 같이 느껴지는 '데자뷔 현상' 비슷한 거 말이다.
나 이거... 전에 본 것 같아
중학교 2학년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순간 문득 나의 미래의 모습이 선명한 이미지로 떠올랐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앞으로 무얼 할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 탓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그려냈던 듯하다. 그때 본 이미지는 내가 어딘지 모를 외국에서 어떤 건물을 막 나서는 장면이었다. 어디 외국어가 쓰여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외국어로 말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왠지 거긴 외국이었고 나는 셔츠를 걷어붙인 채 건물을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비슷한 일은 '외교관'이었다. 그래서 한 때 내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뭐하는 직업인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외교관'을 꿈꿨다. 물론 그게 오래 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 선명한 비전, 말 그대로 '비전'이 고2 때까지는 갔던 거 같다. 어른들이 그렇게 '기술을 배워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당당히 문과를 선택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과가 좀 더 맞았던 거 같기도 한데... 이제와 아쉬워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간 후에는 어쩌다 또 법을 공부하고 '사시'를 준비하게 됐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정확한 순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합격할 줄 알았다. 대학생이 가진 그 무한 긍정의 에너지란 참,,, 그러니 세상의 변화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그리고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열정으로 가득한 대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중2도 대단하지만, 대학교 1학년만큼 엄청난 존재도 사실 없을 거다. 2학년만 돼도 슬슬 깨닫기 시작한다. 내가 뭘 모르는지. 그리고 뭘 할 수 없는지.
삶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이 맞닥뜨려 헤쳐나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어마어마한 고민과 선택들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뭘 그리 고민하며 살았나 싶을 만큼 때론 초라하고, 때론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운명론적인 허무함마저 들기도 한다. 삶 앞에 고민하는 나란 존재는 대체 뭐란 말이냐,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말이다. 어릴 때 몰랐던 '겸허함'이라는 단어의 깊이가 조금씩 나이가 들어갈수록 함께 깊어짐을 느낀다.
내 인생의 롤러코스터라고 해봐야 위대한 저기 저 위인들에 비하면 동네 놀이동산 어린이 열차 수준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여차 저차 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그렇게 서울의 한 복판 명동에서 7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땐 문득문득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한 복판 명동에서 이 높은 빌딩 숲 사이에서 일한다는 것 만으로도 이따금 자위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꿈꿨던 외교관, 검사 등등의 이야기들은 이미 '생활'이라는 어마 무시하게 굴러가는 육중한 수레바퀴 앞에, 그냥 그 수레바퀴를 지탱하는 여러 바큇살 중 하나 정도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사라져도 그다지 생활에 영향 없는 그런 바큇살 중 하나 정도.
입사한 회사에서 해외근무를 생각해 볼 겨를은 전혀 없었다. 국내 유통산업이 메인인 회사에서 해외근무라니, 정말 멀고도 먼 이야기라 감히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기회는 참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기존에 내가 하던 업무랑의 연관성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분야였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업무 롤이었기 때문에 또, 어느 정도는 그래도 나 아니면 누가 하랴 하는 대 1 마인드로 내부 잡 포스팅에 지원했고, 결국은 베트남에 주재원을 나오게 되었다. 오랜동안 본사 마케팅에 있으면서 탈출을 시도했었는데, 3차 시도 만에 성공. 그래서 운동 경기도 3차 시도를 주는가 보구나!
결국 중2 때 꿈꿨던 그 선명한 비전은 이거였던거다.
외국은 외국인데, 베트남. 셔츠를 걷은 이유는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의 전형 이라기보다는 일 년 내내 더운 나라라서. 생각했던 최대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외교관이니 검사니 여러 가지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그런데 '성공'이라는 게 그렇게 거대한 거여야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인생에 나 스스로 정한 작은 꿈들의 성취가 모여 어느 순간 '그래도 이번 생은 성공했어'라는 순간이 오는 거 아닐까. 외교관이라는 걸 목표로 하며 영어 공부 열심히 했던 덕에 그래도 해외에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었고, 검사되겠다고 사시 준비 열심히 했던 덕에 웬만한 복잡한 문제들도 핵심 포인트 들을 나열하고 하나하나 정리해 갈 수 있는 분석적인 역량들을 갖출 수 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결국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길들이 내가 나가고자 하는 방향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갖추기 위한 과정들이었던 것 같다.
이제 한 10년쯤 후에 나는 어떤 모습일지를 다시 그려보고 있다. 또 인생은 직진이 아니라 수많은 갈림길의 선택들 위에 있을 테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작은 것들을 또 갖고 가고 있겠지.
빌딩을 나서는 내 모습을 선명히 그렸던 것처럼.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뉴욕의 빌딩 숲에서 페도라를 쓰고 재킷을 입고, 진한 리바이스 청바지에 윙팁 갈색 구두를 신은채 가죽으로 된 간지 나는 얇은 랩탑 케이스를 품에 안고 서 있는 모습.
거기가 뉴욕 일지, 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지, 몇 살일지도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의 나를 만나기 위해 다시 또 달려봐야겠다.
남들 따라 나도 한번 명언 제조기 도전.
자며 꾸는 꿈은 하루를 닫고,
깨서 꾸는 꿈은 내일을 연다.
(어우..손꾸락이 오그라 드는게..아무나 하는게 아니네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