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 핸드폰을 켜 본다. 아직 해가 지면 날이 춥다. 옷을 조금 더 두껍게 입고 나올 걸…… 아쉬운 마음에 집을 한 번 쳐다본다.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도 30분 있다가 들어왔다. 지난 번에 불이 꺼지고 바로 들어왔더니 아버지가 뒤척이다 잠을 깼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는 불이 꺼지고도 한참을 지나고 들어온다.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씻지도 못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샤워를 하면 물소리가 크게 난다.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선거 노래에 번뜩 깼다. 소리가 너무 크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누나의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등 뒤에서 소리치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수건으로 누나의 이마를 누른다. 아버지가 일어나서 소주병을 깨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112를 누르곤 통화 버튼 위에서 머뭇거린다. 경찰이 올 때까지 아버지가 계속 누나를 때릴까? 지난 번처럼 어른들이 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버지가 잠잠해지면 어떡하지? 두려움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누나와 눈에 초점이 없는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결국 깨진 소주병을 집어 드는 아버지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한참을 혼자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다 보니 귓가에서 희미하게 경찰차 소리가 들린다.
성인 남자 둘이서 아버지와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경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익숙한 얼굴이다. 상대방도 익숙하다는 듯이 누나의 상처를 살피고 병원에 연락을 취한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알지? 어떻게 할래? 서에 가서 진술이라도 할래?” 건조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주방에 굴러다니는 식기를 치우며 됐다고 예의상 거절을 한다. 속으론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고 소리치지만 그쪽에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경찰은 선을 잘 지킨다. 비록 집안에는 아버지에게 시달리다 도망간 엄마를 제외하고 고등학생인 나와 갓 대학생이 된 누나 밖에 없지만 어른들은 선을 지킨다. 문제는 선을 지키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우리 집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경찰에게 횡설수설하는 아버지를 멀리서 바라보며 제발 누구라도 조건 없는 선의를 베풀어 주길 기도한다.
선을 지키는 것은 경찰들, 선생님들뿐이다. 집안 일은 집에서 해결하라는 것이 우리 남매가 줄곧 들어온 이야기다. 매일 같이 아버지에게서 우릴 지켜 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도했지만 소용 없었다. 신성한 기도 역시 집 안으로 선을 넘어 들어오지는 못했다. 선생님들은 고작 신고하는 방법, 상담 받을 수 있는 곳을 알려줄 뿐이었다. 엄마가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어른들한테 배신감을 느꼈다. 어떻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는지 분했다. 엄마까지 사라진 후에는 배신감마저 사라졌다. 모두가 이해됐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을 까 되레 미안해졌다. 어른들은 모두 자기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다는 것을 그때쯤 깨달았다. 나와 누나는 어른들이 정한 선에 갇혀 매일을 불안함 속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