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반 배정을 받은 첫 등교날에 H를 만났다. 아직 교복이 나오기 전이라 H는 회색 체크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오버 사이즈였는지 망토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그게 웃기면서도 은근히 멋져서 친해지고 싶었다.
알고 보니 우리 사이에는 내가 초등학교 때, H는 중학교 때 친했던 같은 친구가 있었다. 내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H는 “네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어.”라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동갑인 친구에게 듣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말투였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H는 종종 신기한 단어들을 썼다.
이런 관점에서 조망해보면 어때? 우리 동네에 큰 건물이 지어지는 바람에 일조권 문제가 심각해. 어제는 밤에 건조하길래 자리끼를 두고 잤어.
머릿속으로 ‘조망하다’, ‘일조권’, ‘자리끼’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내가 “대체 자리끼라는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H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 잘 때 미리 떠놓는 물이야.”라고 대답했다. 그게 얄미우면서도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언어적 표현의 어른스러움이 인간적 어른스러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까? 지금도 그 답을 잘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어른스럽지만 어른이 아닌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어른스러운 사람을 만나서 털어놓고 싶은 게 많았지만, 어른들은 어른스럽지 않으면서도 괜히 나를 기죽게 만들 때가 많았고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찝찝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소심하고 고민이 많고 매번 사람들을 웃기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는데, 그 고민을 재미있게 표현할 말이 없기도 했다. 고민이 있을 땐 “걍 죽고 싶다”라는 말만 반복하던 어떤 날, H가 한 가지 놀이를 제안했다.
고민이 생길 때 진짜 그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대답해보는 게임이었는데,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로는 “그 일이 생기면... 걍 죽지 뭐”라는 대답은 제일 마지막, 그러니까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없어질 경우에 한해서만 쓸 것. 둘째로는 웃기려고 답변을 지어내지 말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상상할 것.
이 놀이는 경우에 따라 쉬는 시간 10분 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야 나 오늘 집에 가스 불 안 꺼놓고 온 거 같은데”
“진짜 안 끄고 나왔으면 어떻게 할래”
“글쎄... 불이 나겠지?”
“불이 났으면 어떻게 할래”
“불이 났으면, 경비실에서 엄마한테 전화하겠지?”
“엄마한테 전화하면?”
“그럼 엄마가 경비실 아저씨한테 집 비밀번호 알려드리고 다른 건 다 불타도 괜찮으니까, 야몽이만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럼 됐네”
“그러네”
대화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야 나 그 일 소문나서 왕따 당하면 어떡하지”
“따돌림당하면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전학 가야지”
“전학 가면 어떨 거 같은데”
“그럼 또 소문나서 왕따 당할 거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하게”
“그럼 자퇴해야지”
“자퇴하면?”
“자퇴하고 이제 검정고시 준비하겠지”
“됐네 그럼”
“근데 문제는, 검정고시 보고 대학 가도 계속 사람이 무섭지 않을까?”
“그럼 네가 검정고시를 패스해서 대학에 갔는데도 계속 트라우마가 남아있어. 어떻게 할 건데?”
“상담 같은 거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상담받아도 계속 안 나을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계속 안 나으면 어떨 거 같은데”
이 정도 되면 이제 ‘걍 죽어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걍 죽어야지’라는 말이 나온다면,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상이지만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을 겪고도 살아있을 미래의 나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놀이를 하던 때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제 H는 직장인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꺼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내가 그 나이 때 그런-조망하다, 일조권, 자리끼 같은- 단어도 썼어?”)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H가 여전히 체크무늬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여전히 내 고민이 웃기지 않아서 ‘죽어야 되나’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오늘과 어제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다가, 조금씩 과거로 다가간다. 그런 생각들을 나누었던 시간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