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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한호랑이 Oct 20. 2021

[작사의 시대 9기] 죽음을 보면 꼭 살고 싶더라고.

10/13) 일기를 편지로, 편지를 가사로

내 아들 태오에게


태오야, 또 엄마야. 하루 종일 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면서도, 또 이렇게 빈 종이만 보면 네 이름부터 쓴다. 

우리 태오. 내 아가 태오. 내 소중한 친구 태오야. 


태오야 있잖아. 엄마가 요근래 마음이 이상했어. 그래서 우리 태오를 계속 안고 있고 싶어. 태오가 아직 어려서 말해주진 못했지만, 며칠 전에 엄마 아는 친구가 너무 아파서 죽었어. 그 이모는 너무너무 살고 싶었는데, 너무 아파서 하늘나라에 일찍 갔버렸네.. 그 이모는 태오같이 예쁜 아기도 낳고 싶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능력도 좋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신혼도 못 즐기고 아프기만 하다가 너무 빨리 갔어. 엄마가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거야. 사는 게 대체 무언가 싶고, 죽는 게 이리 쉬운 건가 싶고.. 그래서 태오랑 주말에 실컷 놀아야 하는데 엄마가 계속 그 이모 항암일기 블로그 찾아보면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태오도 주말 내내 엄마 눈치 봤지? 미안해. 


근데 오늘은 엄마가 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그 이모가 너무 아깝게 가면서 한참을 슬퍼하다가 이 소중한 하루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봐. 그래서 오늘 아침엔 모처럼 일찍 일어나 머리도 감고, 부지런 떨며 설거지, 집 청소도 다 끝내고 우리 태오 챙겨줄 북엇국도 끓이고 두부 으깨서 동그랭땡도 만들어놨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엄마 요가도 다녀왔어. 그리고 오후 일할 때 말귀 못 알아먹는 답답한 파트너한테 얼마나 친절했는지 모른다. 

단정하고 건강하게 살겠다고 찾아 먹은 평양만두. 주말 내내 울다 찾아가서 먹은 만둣국은 왜 그리 맛있는지 한 그릇 뚝딱했다. 

있잖아 태오야! 엄마 진짜 건강하고 예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오늘은 이상하게 엄마 사는 게 너무 소중하고 재미있고 행복하고 그렇다. 엄마는 빨리 안 죽을 거야. 태오랑 오래 살 거야. 그냥도 아주 재미있고 신나게 찐하게 오래 살 거야. 태오 크는 거 다 보고 가고 싶어. 그래서 엄마가 갑자기 의욕이 넘쳐서 집안 뒤집어 청소도 하고, 네 반찬도 만들고,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잘 사는 내 모습을 인스타에 올려 자랑도 하고 싶고 사람들한테 좋아요도 많이 받고 싶어.. 아주 난리법석이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종종거리면서 또 뭘 더 해야 행복하게 잘 사는 건가 이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근데 한편으로  엄마가 그 이모한테 좀 미안한 마음이 생기고 나 스스로도 얄밉기도 해.  그 이모가 죽은 슬픈 사건을 엄마가 '잘 사는 것'에 이용한 것 같아서 말이야. 엄마는 꼭 남의 슬픔을 보면 떠 뜰썩하게 내 삶을 즐기고 싶은지, 지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제야 제대로 살고 싶어 하는지.. 

엄마는 왜 이럴까.


주말 내내 그 이모일로 같이 슬퍼하고 울고 그 이모 일기 한 줄 한 줄 공감하고..  그것도 정말 진심이긴 했거든? 근데 또 갑자기 무슨 마음인지 한 순간 '내 삶이랑은 다르지' '나는 건강하게 잘 살 거야'라고 선 딱 긋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일상을 재정비하는데, 내가 봐도 내가 참 무섭도록 차갑고 매몰찬 인간인 거야. 평소에나 이렇게 잘 살 것이지, 아니 그렇게 유난 떨며 슬퍼하지나 말 것이지, 사람이 이렇게 가볍고 유치한 일인가, 꼭 남의 비극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삶는 모습이, 남의 슬픔을 먹고 내 행복을 키우는 모습이.. 엄마가 생각한 36살,  애도 있는 어른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아서 참 씁쓸해. 엄마는 점잖은 고급 영혼 되려면 멀었나 봐. 


남의 슬픔에 푹 젖어 있다가
 또 확실히 선긋고 행복 찾는 네 엄마란 사람 


태오야. 엄마가 이렇게 반성하고 있지만, 엄마의 삶이 게을러지고 입에서 신세한탄이 멈추질 않을 때, 어느 날 엄마가 또 지인의 슬픈 이야기들을 전하며 호들갑 떨지도 몰라. 그리고 또 그다음 날 제대로 살고 싶다며 서점에서 책을 우다다 사고 운동화 끈 고쳐 매고 운동 나간다고 할지도 모르겠어. 


그때 태오가 "엄마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하고 좀 캄 다운시켜줘. "너무 티나요"라고 눈으로 말해줘. 

엄마 이제 좀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아. 점잖게 적당하게 살고 싶어. 태오가 엄마 좀 도와주라. 


+ 그리고 태오야. 이게 편지이긴 할까. 그리고 이게 과연 가사가 될 수 있을까... 가사가 되다면 무슨 타령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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