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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딜러 한혜미 May 22. 2020

간송의 보물들

간송 전형필이 지키려고 했던 우리 문화재의 가치

미술관련기사를 빠짐없이 보려고 노력중인데요. 유독 이번 이야기는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Sharp Spoon에 기고했어요.

원문보기: http://sharpspoon.kr/interview_detail?id=27






우리나라의 보물 2점이 미술 경매시장에 등장했다.


출품된 유물은 1963년에 지정된 제284호 <금동여래 입상>과 제284호 <금동보살입상>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 이번 경매를 통해 새로운 소장자를 맞이할 예정이다.



보물(寶物): 유형문화재 중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자문기관인 문화재위원회의 심사와 토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 ex) 1호: 서울 흥인지문(동대문), 2호: 서울 보신각종
@네이버 지식백과



좌) <금동여래입상(보물 284호)>, 우) <금동보살입상(보물 285호)> @케이옥션




 <금동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7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청 된다.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보물 제284호로 지정되었으며, 출토지에 관한 정보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도금이 벗겨진 흔적이 있으나 부처와 대좌의 형체가 비교적 손상 없이 잘 관리되어 있다.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높게 솟은 육계(정수리에 우뚝 솟은 것),  좁은 어깨, 굵은 옷의 주름을 알 수 있다. 벗겨진 도금 안으로 보이는 좁은 이마와 긴 눈매는 근엄한 분위기를 풍긴다. <금동여래입상>은 당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작품으로 추정되며, 경매사 케이옥션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접어드는 전환기에 서 있는 불상임을 증명한다'라고 서술했다.


<금동보살입상>은 삼국시대의 보살상으로 6세기 말~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85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남 거창에서 출토된 유일한 보살상이다. 옛 백제에서 유행하던 형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보존이 비교적 잘 되었다.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얼굴에 비해 굵은 목과 양쪽으로 뻗은 천의가 눈에 띈다. 가늘게 뜬 눈매와 오뚝한 코, 그리고 통통한 볼은 국내의 다른 보살상을 연상시킨다. 케이옥션은 '백제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봉보주보살상과 일본의 초기 불상이 형성한 교류 속에서 현재까지 유일한 신라 지역 출토 불상이기에 영향 관계를 제시할 자료가 되는 불상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의 소식을 다룬 기사에 따르면 추정가는 각각 15억 원으로 매겨졌다.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두 보물의 출품 이유는, 소장처인 간송미술관의 재정난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미를 소중히 간직하라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문화재단 공식 블로그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분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문화계의 위인이다. 서울 최고의 부호였던 그는 막대한 재산을 통해 문화재 수집에 힘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유출이 되었거나, 될뻔했던 유물들을 사들이며 식민시대의 암흑기에 우리 문화와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후 후대까지 우리의 문화재를 잘 전달하고자,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의 노력에 존경스러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그가 수집을 했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창씨개명 등의 민족 말살정책을 시행하던 때였다. 이름을 강제로 바꾸려고 했던 시기에 우리의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킨다니, 게다가 박물관을 짓는 그의 행동은 매우 큰 용기와 배포가 필요했다.(이에 보화각은 박물관이 아닌 창고로 허가를 냈다) 결국 그는 우리의 역사가 담긴 문화재를 지켰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후에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가 후대를 위해 세웠던 보화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은 서울의 3대 미술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불린다. <훈민정음해례본>과 신윤복의 <미인도>, 김득신의 <풍속도화첩>등 국보급 문화재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간송이 별세한 이후에도 그의 뜻을 3대에 걸쳐서 이어가는 중이다. 간송 전형필은 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는데, 사후 공로를 인정받아서 문화포장 및 국민훈장이 추서 되었다.




좌) 신윤복 <미인도>, 우) 신윤복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조선시대의 화가 '신윤복'은 간송미술관의 인기스타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신윤복이 재조명되면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미인도>와 <혜원전신첩>에 담긴 <단오풍정>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는데, 이 역시 간송이 수집하고 지켜온 우리의 보물이다.


보물 제1973호 <미인도>는 우리나라의 미인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당시 사회상으로 비추어볼 때 미인도의 모델은 기생이자 그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추정된다. 그림 왼편에 적힌 "화가의 가슴속에 춘정이 가득하니, 붓 끝으로 겉모습과 함께 속마음까지 그려냈네(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의 제화시로 신윤복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에서 '전신'이란 '사물이나 사람의 본질과 정신을 표현하거나 실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렸다'는 뜻으로 독립운동가이자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이 붙인 이름이다. 1934년 간송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혜원전신첩>을 구입했으며, 그 안에는 <단오풍정>과 <월야밀회>등 약 30점의 유명한 작품들이 담겨있다. 혹자는 영화의 스틸컷 같다고 표현하는데, 그만큼 그 시대의 생생한 사회상을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생활사와 복식사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미술관




간송의 수집은 단순한 개인의 취미가 아니다. 안목 높은 수집품들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뿐만이 아닌, 수집품을 대하는 그의 자세에서 취미를 넘어선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그는 작품을 구입할 때 가치에 응당한 대우를 하기 위해 과정에서부터 진심을 다했다. 대표적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을 구입했던 일화를 들 수 있다.


한글 창제 원리의 위대함을 담은 <훈민정음해례본>도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간송은 <훈민정음해례본>을 구매하길 희망했고, 판매자는 그 값으로 기와집 한 채 정도의 금액을 요구했다.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비하면 매우 적은 금액이었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그러나 간송은 <훈민정음해례본>의 가치에 응당한 대우를 하기 위해 제시한 금액의 열 배로 구입했다. 이후 그의 노력은 피난길에서 품에 안고 다니며 해례본을 지키려고 했던 행동들로 이어졌다. 그 정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한글의 자부심을 선물해주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게 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그가 세상을 떠나 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해례본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의 유일한 진품이었다.





<미인도> 앞에서의 간송 @간송미술문화재단 공식 블로그




"간송미술관은 존재 자체로 놀라움이다. 8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양도성이 눈 앞에 펼쳐지는 현장에서 보화각을 짓겠다고 마음먹고 최고의 건축가를 선택한 간송, 건축주의 요구에 심혈을 기울여 화답한 건축가의 의지가 시간의 간극을 초월해서 미술관에 그대로 담겨 있다. 미술관에 담긴 간송의 진정성이 시대를 넘어 지속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함께 나누면서 우리의 문화예술의 가치를 공유하는 현장으로 간송미술관이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하루빨리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안창모(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간송미술관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봄과 가을에 2주씩, 일 년에 두 번 대중에게 개방을 한다. 1년에 4주라는 짧은 개방 기간과 신윤복의 높아진 인기로 매년 전시가 시작되면 긴 줄을 볼 수 있다. 이에 2014년에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일반 공개를 시작하며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김구는 '오직 같고 싶은 건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우리는 간송의 노력으로 문화의 힘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그 당시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건 막대한 재산이 있어서만이 아닌, 그 유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진정으로 지키려고 했던 노력 덕분이었다. 누구나 여건이 된다면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간송 전형필'과 한민족이라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이 느껴진다.


국가의 문화재가 경매시장에 등장하는 일은 낯선 일이 아니다. 문화재청에 거래내용을 신고한다면 국외에 반출하지 않는 한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송이 지키려고 했던 뜻을 후대의 우리가 잊어가는 것 같아서 이번 일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5월 27일, 간송이 지켜온 두 보물이 경매시장에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를 알아보는 이를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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