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
스페인 여행 중 프라도 미술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고야'라는 화가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시간이었죠. 그런데 스페인을 대표하는 이 화가가 '스페인 최초로 인물 누드화'를 그렸고, 이것 때문에 수석 궁정화가에서 종교 재판의 대상자가 되었던 사실 아시나요?
어플 속 작가들의 미술관, [Sharp Spoon]에 기고했던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sharpspoon.kr/interview_detail?id=55
1815년 스페인의 마요르 광장에서 종교재판이 열렸다. 종교재판은 이단자를 탄압하기 위해 행해지는데 이번 재판의 대상자는 다름 아닌 스페인의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였다. 그림으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기라도 한 것일까. 어떤 그림을 그렸길래 수석 궁정화가라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종교재판의 대상자가 되었을지, 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 1746~1828)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이자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다. 현재는 '천재화가'라는 칭호로도 불리지만 그의 과거를 보면 우리가 아는 천재와는 조금 다른, 치열했던 한 예술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고야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왕립 아카데미에 두 번을 낙방하고 왕립 미술 학회에 거절까지 당했다. 현실사회 속의 미술 세계는 그에게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이후 로마로 유학을 떠나 베네치아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이탈리아의 파르마 회화전에서 2등을 수상하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초기 그의 작품은 밝고 화사했다. 앞으로의 꽃길을 예상하듯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로 작품 속에서 아이들과 서민의 모습을 밝게 표현하거나, 주문에 맞춘 신화 속의 작품도 있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은 출세에 대한 욕망과도 맞물렸다. 그는 당시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이자 궁정화가였던 베이유와 친하게 지냈고, 뒤이어 그의 여동생과 결혼을 헸는데 그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가족이 된 베이유의 도움으로 궁전의 테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귀족들과 왕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실력을 인정받으며 왕실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야는 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했고 그중에선 카를로스 3세의 국왕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해에 아들이었던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면서 마침내 1789년, 그는 꿈에 그리던 궁정화가가 되었다.
1780년-90년대의 고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궁정화가가 되었고, 화가로서 최고의 시기와 명예를 누렸다. 뛰어난 실력과 처세술로 새롭게 부임한 군주와 여러 상류 계층의 초상화들을 도맡았다. 비록 1790년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청력을 상실하며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위상은 그대로였다.
그러던 중 모두를 놀라게 한 그림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옷을 벗은 마하>였다.
청록색의 침대 위에 한 여인이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볼이 붉어진 채 관람자를 응시하며, 옷을 걸치지 않은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를 그림에 그대로 드러냈다.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는 몇 가닥을 제외한 채 몸 뒤로 넘겨져 있고, 배경은 어둡게 처리되어있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모델에 더욱더 집중하게 한다.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당시 권력자였던 마누엘 고도이가 주문한 작품이다. 후에 그가 물러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공개와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가 당시의 '금기'를 깬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비너스와 같은 신의 누드를 제외하고는 여인의 누드화가 금기시되었다. 다시 말해, 여인의 누드화를 그릴 때에는 '신'이라는 표시가 함께 드러나야 했고, 그마저도 은밀한 부분은 손이나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서 가려진 채 그려졌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우선 '신'이라는 표시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작품 속에서 어떠한 비유도 찾아볼 수 없는 일반 여성을 그린 그림이었다. 신체의 부위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에 대해선 작품 제목의 '마하(maja)'가 유일한 단서였는데, 이는 스페인어로 '멋쟁이 여자, 매력적이고 요염한 여자'의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의 권력자였던 고도이의 주문 요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이런 이유로 고야의 거의 유일한 누드화가 세상에 등장했다.
<옷을 벗은 마하>가 그려지고 몇 년 후 <옷을 입은 마하>도 제작되었다. 초록색의 침대, 인물의 동작과 시선은 <옷을 벗은 마하>와 동일했다. 옷을 입은 것 외에는 전작에 비해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 감돌며, 옷에 맞게 메이크업을 한 것처럼 인물의 얼굴이 꾸며져 있다.
이 작품 역시 <옷을 벗은 마하>를 주문했던 고도이의 저택에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고도이의 저택에는 누드화를 보관하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옷을 입은 마하>를 <옷을 벗은 마하> 앞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평소에는 앞에 있는 <옷을 입은 마하>를 보여주었고, 최측근이 왔을 때만 뒤에 있던 <옷을 벗은 마하>를 불에 비춰서 보여주었다. 그러한 관람법은 상상력이 더해져 작품을 더욱더 외설적으로 보여줬다고 한다.
고야가 <옷을 입은 마하>를 그린 이유로, 종교 재판에서 <옷을 벗은 마하>에 '옷을 입힐 것'이라는 압력을 받아서 라는 의견이 있다.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에 옷을 입히라는 것인데, 고야가 이를 거부하고 <옷을 입은 마하>를 새롭게 그렸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 의견은 종교재판의 시기와 맞지 않아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몸과 얼굴이 따로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얼굴과 몸을 연결시켜줄 목이 부자연스럽게 처리되어있다. 이에 몸과 얼굴을 따로 그렸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사람을 한 호흡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같은 모델을 그린 유일한 작품'들로 고야의 궁정화가 자격은 박탈된다. 연이어 작품 속의 '모델'이 누구인지 종교재판을 통해 밝히려고 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만 할 뿐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고야가 끝까지 밝히지 않았기에 작품 속 모델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추정해서 가장 유력한 모델로 '알바 공작부인'이 언급된다.
1795년에 그려진 <The White Duchess>와 97년에 그려진 <The Black Duchess>의 모델은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알바 공작부인이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결혼을 한 유부녀였고, 고야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며칠 동안 함께했다. 이에 둘의 염문설이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고야는 작품 속에 단서를 남기기도 했다. 이에 <옷을 벗은 마하>가 둘의 사이를 의심하는 그녀의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녀의 생김새와 시기가 맞지 않아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실제로 스페인의 알바 가문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문인데, <옷을 벗은 마하>가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의견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했다. 이에 1945년에 그녀의 묘를 파헤치고 법의학자들에 의해 조사를 시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바 공작부인의 유해가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손상되어서 확인이 어려웠고, '동일인이 아니라고도 확신할 수 없다'라는 법의학자의 의견으로 논란은 다시 원점으로 향했다)
이 외에도 주문자인 고도이가 아끼는 여성을 그렸다는 것과 작품 속 여성은 실존 인물이 아닌,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모델과 의도가 어찌 되었건, 이후 두 작품은 종교재판에 의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압수되었다가 1836년에 반환되었다.
이후 고야의 말년에 제작된 작품은 전쟁에 관한 기록과 귀가 안 들리면서 어둡게 변한 성격이 반영된다. 실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된 프라도 미술관을 둘러보면, 급격하게 달라진 그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말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도 전쟁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전쟁의 공포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민들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이들의 야만성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은 이들 뒤로 공포에 떨며 손을 들고 있는 인물과, 손으로 눈을 가리며 상황을 외면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그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총을 쏘는 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각진 포즈에서 망설임 없는 비장함이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그들의 죽음을 외면하듯 불이 꺼져있는데, 가장 환하게 비춘 곳이 안타깝게도 죽음을 직면한 이들의 앞이다.
훗날 마네와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그가 느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회에 저항을 했고, 이를 풍자로 작품에 표현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전쟁의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했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 집권층에게 잘 보이려고 그렸다는 상이한 해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 규칙이란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외부에는 고야의 모습이 담긴 큰 조각상이, 내부에는 그의 변화하는 작품 일대기를 층별로 만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서도 그 의미가 분분하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에 존경심이 들 정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의 최초 인물 누드화로 평가되며 <옷을 입은 마하>와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작품들이 현재의 시선으로 비평가들과 대중에 의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논란이 되거나 빛을 받지 못하는 작품들이 후대에는 어떤 평가로 함께할지, 한 예술가의 파격적인 그림을 보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