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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두 Feb 28. 2022

내가 풋살을 시작하게 된 건

풋살과 지하철 9호선의 상관관계

   

     

  최근에 들어 풋살을 시작했다. 음치인 아빠와 몸치인 엄마로부터 음치 몸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는 여전히 유전적 결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음치 몸치인데, 이런 나의 음치 몸치 유전자는 풋살 동호회에서 큰 빛을 발하고 있다. 주로 내가 하는 역할은 공이 나에게로 오면 크게 당황하며 삑사리를 내다가 팔과 다리를 비상식적으로 따로 움직여 좌중을 폭소케 하고는 결국 공을 패스받지 못하고 노룩 패스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나 풋살 드럽게 못한다. 그래도 가끔 나의 밑바닥 실력을 알지 못하는 상대편에게는 유효한 페이크 전략이 되기도 한다. 내가 공을 패스받을 거라 생각하고 나를 마크하러 뛰어온 상대편에게 ‘짠! 나 공 없지롱!’을 시전 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전략은 상대팀뿐만 아니라 우리 팀, 심지어 나까지 속인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이런 치명적인 풋살 실력을 가진 내가 어쩌다가 풋살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거기에는 지하철 9호선의 톡톡한 몫이 있다. 문제의 날로 돌아가 보자. 그날은 운이 좋게도 지하철 문 쪽이 아닌 좌석 앞 쪽에 서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팁을 주자면 9호선같이 만차 지하철을 오래 타고 가야 할 때에는 무조건 문이 열리는 방향이 아닌 좌석 쪽으로 몸을 던져 넣어야 한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에게 밀려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빨랫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 문 앞을 '세탁기 존'이라 칭한다.) 하여간에 그날의 나는 다행히 세탁기 신세는 면했고, 다소 여유롭게 서서 김혼비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있었다. 기사 속에서 작가님은 축구를 시작하고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잘 싸우게 되었다’고 답했다. 축구를 하면서 몸싸움도 많이 하고 고함지르기도 하면서 과거에는 두려워서 피했던 사람과의 싸움을 덜 두려워하며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싸워야 할 때 주로 더러워서가 아닌 무서워서 피하는 나에게 혹하는 문장이었다. 어쩌면 나도 축구를 배우면 싸움닭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런 야망찬 싸움닭의 꿈을 품고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중에 지하철은 어딘가에 정차했다. 아마도 고터-동작-노량진 이 셋 중 하나였을 터. 내리려는 사람의 꿈틀거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움찔거림 한데 섞여 요동치는 파동이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세탁기 존으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있었고, 좌석 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기 때문에 밀려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물결에서 비교적 안전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껏 다수의 역을 내 옆에서 나란히 함께 온 남성분이 나를 밀치기 시작했다. 아, 이번에 내리시는구나. 나는 좌석 쪽으로 몸을 더 당기며 나가시는 길을 터드렸다. 그런데 나의 배려가 보이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그분을 품기에 내 배려가 너무 작았는지 모르겠다. 그분은 내가 만든 틈으로 갈 마음은 없다는 듯이 나를 더 세게 밀기 시작했고, 내 몸은 휘리릭 돌며 그분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내 정신도 휘리릭 돌기 시작했는데, 그분이 나를 방패 삼아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 등에 팔을 가로로 댄 채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무력하게 밀려나며 내 눈앞의 사람들을 헤쳐나갔다. 그 자세가 너무나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굴려 방패 신세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고, 애초에 그럴 정신도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지하철 문 앞에 서있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려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이 짧고도 치욕스러운 방패 신세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방패 사건에 대해 여러 날을 분노했다. 왜 그분은 미리 문 앞으로 가까이 가서 내릴 준비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분노했다가, 그러기엔 열차 안이 너무 빽빽했지 하고 대리 변명을 했다가,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방패로 썼는지에 분노했다가, 내 옆의 할머니를 방패로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했다. 그렇게 방패 사건을 두고 다각도로 분노하던 중 나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나는 왜 떡 버티고 서있지 못했을까. 왜 힘없이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졌을까. 나는 약한가? 그러다 나는 내 몸을 지킬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간 여러 종목의 운동을 배우면서 약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매번 약하게 포기하기보다는 악바리 있게 해낸다는 생각으로 덤볐고, 그런 깡은 꽤나 먹혔기 때문에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약했다. 테니스를 배울 때는 내가 쳐낼 수 있는 강도로 공이 날아왔지만, 세탁기 존은 내가 감당하기 벅찬 강도로 나를 쳤고, PT를 받을 때는 내가 들 수 있는 만큼의 무게를 들었지만, 세탁기 존은 도무지 내가 들 수 없는 무게로 나를 밀었고, 필라테스를 배울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동작을 반복할 수 있었지만 세탁기 존에서 다시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었다. 압도적인 힘 차이에서 오는 막연한 무력감. 도무지 내가 이길 수 없는 힘이라는 생각. 이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우울해졌다. 


    그래서 나는 풋살을 시작했다. 조금 뜬금없는 풋살의 등장이라 할 순 있겠지만, 방패 사건 발발 직전에 내가 김혼비 작가님의 풋살 에세이 인터뷰를 보고 있었던 건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 내게 풋살을 시작한 이유를 묻노라면 지하철 세탁기 존에서 잘 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싸움닭 같으니 김혼비 작가님의 유려한 필력 덕분이라고 하겠다. 어쨌거나 홧김에 시작하게 된 풋살이지만 꽤나 재밌고 성취감도 나날이 오른다. 풋살을 하며 내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힘들에 맞서는 경험이 생경하면서도 가슴이 콩콩 뛴다. 풋살을 하다 보면 날아오는 공에 턱을 맞아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하고, 단단한 풋살화의 앞코로 정강이를 얻어맞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몸싸움에 퉁- 밀쳐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얻어맞으면서 나는 막연히 두려워만 했던 힘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몸이 그 힘들에게 잘 맞서 싸움을 체감한다. 그러다 가끔 골까지 넣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방패 사건 덕분에 풋살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당신 욕은 하고 다니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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