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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걸 Dec 21. 2024

유튜브보다 수필을

수필이 고민에서 벗어나게 한다

나는 보험사의 영업지원 팀장이다. 하루 종일 영업 현장에서 수당 제도의 예외 적용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는다. 성난 고객이 민원을 넣으면 처리해야 하는 것도 업무 중 하나다. 돈과 사람 문제로 생기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상이 매일 이어진다. 그 와중에 영업 실적이 부진하면 위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는다.


퇴근 후에도 고민은 머릿속을 차지하고 앉아 쉽게 나가질 않는다. 마음 정화에 좋다는 조깅, 사우나로 시도해 보았다. 집안일을 하면서 현재 하는 활동에 집중해 보기도 한다. 명상을 해보기도 하고 좋은 향을 맡으며 마음을 달랜다. 


해소하는 방법이 안착되기도 전에 더 큰 고민이 떠오른다. 딱 이것이면 고민과 번뇌에서 바로 탈출할 수 있겠다 싶은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제일 좋은 방법은 운동이었는데, 요즘에는 달릴 때에도 일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맥주를 홀짝거리며 유튜브를 보는 습관에 정착해 버렸다. 술에 취해 머리가 둔감해지는 데다 화려한 영상이 시선을 끈다. 그러면 고민이 멈추게 된다. 문제는 매일 혼술에 빠져 피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말뿐 아니라 매일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영상을 본다. 술과 안주로 뱃살이 늘어난다. 건강이 조금씩 나빠진다는 것도 몸으로 느낀다.


먼저 술부터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 알코올 의존증은 끊어내기 쉽지 않았다. 첫째로는 술이 없으면 바로 머릿속이 고민이라는 구정물로 가득 차는 기분이라 이걸 바로 떨쳐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둘째로는 맛있는 안주와 시원한 맥주가 목을 넘어가는 느낌을 뿌리치기 어렵다. 폭풍 속 같은 낮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해가 지고 퇴근을 할 무렵의 묘한 분위기. 파플로프의 개처럼 이 시간대의 분위기가 오늘 어떤 걸 먹고 마실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왜 옛날 나의 팀장님들은 저녁만 되면 회식을 못해서 안달이었는지 그 나이가 되니 알겠다.


당장 술을 떨쳐내는 걸 포기했으니 영상 보는 행동이라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해 거북목을 하고 스마트폰 화면을 4~5시간 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니 점점 목이 아프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 퇴근하고 막 폰을 손에 쥔 것 같은데,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어있다. 후회와 허무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영상 대신 책을 보자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어려운 책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수필을 골랐다. 소설과 수필 중에 갈등했다. 소설은 캐릭터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부담스러웠다. 몰입하게 되지만 책을 놓고도 소설의 분위기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캐릭터의 갈등과 방황을 내가 가지고 나온 느낌이랄까. 반면 수필은 적당히 나의 현실을 잊게 만들어 주면서 뒷맛이 그리 강하지 않다. 잠시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고 쉽게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고른 수필집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여행 아닌 여행기>였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오래전 한때 서가를 점령했던 유명 작가였다. 몇 권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감상이 어땠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여행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여행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여행 아닌'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삶을 여행이라고 보고 그냥 일상에 대한 글을 적었다. 내용보다 제목을 참 잘 뽑았다.


일부 내용은 일본인만의 정서가 담겨 있어 다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게는 유튜브를 대신하기 충분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도쿄의 옛 동네가 개발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나도 서울의 변두리 동네 출신이라 부모님 댁에 들를 때마다 변한 동네를 보며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꼬불꼬불한 골목길, 복잡하게 얽힌 집이 아직 남은 걸 보면 재개발이 좀 되어야지 싶다가, 고향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는 이제는 성향이 맞지 않아 잘 만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 줄곧 붙어 다녔던 친구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당시에만 친했던 친구가 몇 있다. 매일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던 단짝이었다. 중학교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렇게 친했는데 왜 다시 찾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걸까. 책을 읽으며 세상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의 10만 보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제 60~70을 맛보고 사고하는 듯한 느낌.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어느새 효율성과 성과에 집착하게 되었다. 최대한 적은 시간을 투자해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행동만 추구했다. 독서는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거나 지식을 쌓기 위한 행위였다. 그냥 일상의 넋두리에 불과한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왠지 생산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수필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중독을 극복하는 요령은 건전한 대체제다. 아직 영상에 빠지는 행동을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지만 스마트폰보다 책을 드는 시간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조금 가벼운 소설로 영역을 넓혔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임업을 하는 산골 마을에서 일하게 된 젊은 주인공의 이야기다.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계절이 잘 묘사되어 있다. 큰 사건이나 갈등이 없는 잔잔한 소설이다.


맥주는 그냥 마시자 했는데 신기하게도 책과 술은 잘 안 어울린다. 책 읽기에 빠져 있다 보면 술이 남는다. 몇 번 남은 술을 버리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쁜 녀석들은 꼭 나쁜 것들끼리 몰려다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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