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광호 Apr 02. 2024

[축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머리말

“축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역구와 여의도 보좌진을 비롯해 한 국회의원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팀이 처음 모인 자리, 나는 이렇게 자기소개했다. “축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활짝 웃고 덕분에 첫 만남의 어색함도 다소 누그러졌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보좌진이 고작 축사라니. 정부 실책에 대한 신랄한 질타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국정감사, 후보자의 신상을 흥신소보다 더 탈탈 털어 버리는 인사청문회, 말 한마디에 예산 수백, 수십 억이 좌지우지되는 회의장, 그 배후의 실무를 조직하는 보좌진이 하찮게 축사라니 말이다. 더욱이 40대 초반 늦깎이로 국회에 들어와 스스로 말단임을 고백하는 소위 셀프 디스 소개였다.     


21대 국회 전반기 약 2년간 의원실에서 근무하며 주로 메시지를 전담했다. 기자회견문, 토론문, 보도자료를 포함해 각종 글을 썼는데 가장 많이 쓴 것은 무엇보다 축사다. 보통 인턴이나 비서가 담당하는 하찮은 업무로 간주되지만 사실 축사는 누군가의 마음에 호응할 수 있는 통로다. <발달장애인 제과제빵 발대식> <전국여성씨름대회>부터 <문인협회 징검돌지부 계간지 발간> <임대아파트 대책위 출범식>까지 각종 축사 요청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 기쁨, 고충, 일상이 담겨 있다. 그래선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킨, 9시 뉴스에서도 톱뉴스를 장식한 보도자료보다도 보통의 축사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     


물론 기본으로 바쁜 국회 업무에 꾸준히 비집고 들어오는 축사 요청이 귀찮았다. 수도권과는 달리 지자체 네 곳을 아우르는 지역구여서 축사 요청도 네 배로 많았다. 부끄럽게도 기계적으로 쓰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 요청에 담긴 마음 하나하나를 헤아려 화답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혼잣말로 ‘이게 다 한 표, 한 표야. 선거철 임박해 표 달라고 하지 말고 지금 표를 얻자’하며 선거운동하는 마음으로 쓰기도 했다. 드물게, 기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감사 인사가 돌아오고, 현장 축사 영상에서 진심으로 화답하는 박수를 확인하기도 했다. 기뻤다.     


이 글은 축사 글쓰기 책이다. 무슨 축사를 가지고 책을 내느냐는 비아냥거림이 들릴 것도 같다. 좋게 말하면 논문처럼 형식이 정해진 글, 나쁘게 말하면 뻔한 글이지만 뻔한 형식에 뻔하지 않은 메시지를 담는 데도, 때론 형식을 파괴하는 데도 능력이 필요하다. 문제의 본질을 짚는 토론회 축사, 공감 중심의 지역 행사 축사, 참석자의 나이, 성별, 그날의 날씨, 공간까지 고려해야 하는 현장 축사. 이처럼 축사는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글이다.     


축사를 쓰면서 가장 많이 고려한 것은 무엇보다 읽는 사람의 입장, 마음이다. 차마 축祝이 들어간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지는 <사회적 참사 재발 방지 토론회>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형식을 깨고, 지금껏 참사의 반복을 막지 못해 온 정치인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그런 죄송한 마음을 먼저 드러냈다. <지역 문인 협회 계간지 발간> 축사에는 작가들이 시, 소설을 위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그렇게 단어와 문장을 매만졌을 무수한 밤을 헤아려 보았다. 이처럼 하고 싶은 말에 앞서 읽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때 고작 축사,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독자도 한정되고 대개 팸플릿이나 자료집에 실렸다 결국 폐지가 될 운명인 그 글에도 힘이 생기고, 소수일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었다.     


국회와 지자체, 기관과 회사에서 축사를 담당하는 인턴, 비서를 염두에 두고 썼지만 글쓰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국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문사회과학책 9권을 번역했다. 정치학 석사(공부도 논문 작성도 서툴러 4년 만에 졸업했다), 영어과외강사(내 영어 실력은 오르는데 아이들 점수는 안 올라 잘렸다), 가사·돌봄노동자, 대리운전기사, 이 모든 경험이 글쓰기의 자양분이 됐다. 축사 작법에 관한 책이지만 축사라는 형식을 빌려 세상에 하고 싶은 말도 담았다.     


정치판도 글쓰기라면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모인 곳이고 내 글쓰기의 수준과 한계도 잘 알기에 책을 내는 게 부끄럽기도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수준 높은 글쓰기 책은 아닐지라도 글쓰기 방식을 풍성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이 축사 업무를 처음 맡은 분들, 그리고 어떤 유형의 글이든 글쓰기를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분들이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책이 되기를 희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