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혼자 사는 것은 처음이라
나이를 좀 먹었다고 해도, 인생을 좀 살아봤다고 해도 언제나 새로 하는 일은 낯설고 실수가 많다. 더구나 그게 말도 통하고 웬만한 것은 대충 아는 우리나라가 아니고 말 그대로 낯 설고 물 설은 외국에서 혼자 사는 삶은 크고 작은 실수투성이의 삶이 된다. 사람은 실수를 먹고 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 키는 똑같고 태국에서 혼자 사는 삶은 후회스러운 실수 투성이었다.
그동안 4일이나 5,6일 정도 가는 해외여행은 가끔 해봤지만, 혼자서 2년이나 외국에서 지내는 삶은 처음이다. 한국에선 자취나 하숙도 안 해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낸 일도 국내여행 말고는 거의 없는 삶을 살았으니 냄비 하나 사는 것도 나에겐 큰 일이었다.
역시나 삶의 기본은 의식주. 옷이야 몇 벌 챙겨갔으니 당장 필요한 것은 먹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전기밥솥과 냄비세트를 샀는데 이건 좀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결정이었다.
큰 마트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적당해 보이는 전기밥솥을 샀는데 이게 너무 큰 게 문제였다. 태국은 날이 덥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태국 쌀로 밥을 하면 이틀만 지나도 밥솥에 물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하루치 밥을 하다 보면 밥솥이 너무 커서 밥솥에 쌀이 거의 바닥에 깔릴 정도로만 쌀을 붓고 밥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 밥도 잘 안되고 밥맛도 없거니와, 매일 쌀을 씻고 매일 밥을 하면서 매일 후회를 했다. '아 밥솥을 좀 작은 걸로 사는 건데...'
전기밥솥을 사면서 바로 옆에 있는 냄비 그릇 코너에서 냄비를 골랐다. 그런데 냄비가 3개나 들어있는 세트를 다른 냄비 한 개 가격으로 세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묻고 따지고 할 것 없이 그 냄비세트를 카트에 담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음식을 해보니 문제는 이 냄비가 너무 얇다는 것! 바닥은 너무 얇아서 냄비를 불위에 놓고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음식이 타는 바람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고, 냄비 뚜껑은 얼마나 얇은지 설거지를 하다가 냄비 테두리에 손바닥을 벨 정도였다. 이게 무슨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살인무기 냄비도 아닌데 설거지를 하다 피를 보다니... 살인무기용 냄비에 감자를 볶고 김치를 볶을 때마다 바닥에 눌어붙을까 봐 자리를 못 뜨고 주걱으로 냄비를 저어야만 한다. 그럴 때마다 후회를 했다. '3중 바닥 냄비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아 냄비를 좀 두꺼운 걸로 사는 건데...'
그러나 무엇보다 후회되는 것은 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삶이었다.
밤새 고생하는 콘도 경비와 야식을 같이 먹으며 태국말을 하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길 건너 과일과게에선 망고를 사면서 베트남 출신 주인아저씨 '티라'랑 좀 더 박항서 감독 얘기를 했어야 했다 태국말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이싼 시장에서 감자와 양파를 파는 두엉폰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언제나 신선하고 큰 계란을 싸게 팔던 넝카이 출신의 '퐁씨리' 와는 떠듬거리는 태국말이라도 일부러 흥정도 하면서, 1밧이라도 깎는 척하면서 그들 삶으로 좀 더 들어갔어야 했다. 맛없고 입에 안 맞는 길거리 태국 음식이라도 나에겐 우리 떡볶이가 되고, 붕어빵이 되고, 맛있는 어묵꼬치가 되어야 했다.
나보다 더 부끄럼을 잘 타는 태국 사람들에겐 내가 더 먼저 다가갔어야 했다. '끄랭짜이'라는 말처럼 내가 불편할까 봐 먼저 다가서지 못하는 그들에겐 내가 먼저 용기를 내고 어깨동무를 했어야 했다. 생생한 태국어를 쓰는 그들을 앞에 두고 유튜브 강의와 회화책에 매달리는 것만큼 바보 짓은 없었다.
짧지 않은 태국에서의 삶이 후회스러운 것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혼자 살아 본 태국에서의 낯선 삶은 인생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흥미진진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하루하루가 실수와 후회로 범벅이 되더라도 언제나 설레고 기대되는 내일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경험이었다.
어제와 같은 삶은 없으니 인생은 매일이 새롭다. 후회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