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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Apr 13. 2020

현지어 잘하려면

-태국어는 어려워!

외국에 살다 보면 별의 별일을 다 겪는다.

하지만 황당하고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도 짧은 여행에서 겪는 일과 봉사란 명목으로 현지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오래 머물면서 겪는 일은 그 내용과 해법이 다르게 마련이다.


내 경험상 외국에 살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말만 통하면 다 해결된다.   과장이라고?   물론 과장이다.   좀 오래 살다 보면 차츰 친절과 인내만으로 통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고, 유튜브 강좌와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말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같은 말이라도 내가 배운 뜻과 현지인들이 쓰는 말뜻이 다른 경우를 겪게 되면서 흔히 말하는 문화의 장벽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경지까지만이라도 가신 분은 나에겐 신과 동급으로 보인다.


초기 외국 생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첫째 방법은 현지어를 잘하는 거다.   그리고 둘째도 셋째도 무조건 현지어를 잘하는 거다.   현지어만 잘하면 외국생활의 골치 아픈 거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곳, 태국어는 정말 어렵다.


우선 태국어는 자모음이 모두 76글자나 된다.   외국 글자는 어느 글자든 어렵게 보이지만 태국어는 글자 수도 많거니와 '후아'라는 동그라미가 안쪽에 달리느냐 바깥쪽에 달리느냐에 따라 다른 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쓰기도 외우기도 정말 힘들다.   솔직히 지금도 헛갈리는 글자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다가 이 헛갈리는 글자들을 태국 사람들은 띄어쓰기도 안 하고, 쉼표나 마침표 같은 문장부호도 안 쓴다.

이러니 당장 뭐가 뭔지도 모르는 글자들이 빽빽이 써진 공문서를 보면 정말로 눈은 흐려지고 머리에서는 김이 날 수밖에...   끝없이 이어진 글자들을 아무리 봐도 어디까지가 한 낱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읽을 수가 없으니 외우기가 안 되고 그러니 당연히 태국어를 쓸 수도 없다.   실제로 태국에 이민 와서 10여 년을 살고 있는 교포 중에서도 태국말을 할 줄은 알지만 태국 글은 못 쓰는 분이 꽤 많다고 한다. 


그다음에 넘기 어려운 산이 있으니 그것은 곧 성조!   태국어엔 성조가 5개가 있다...라고만 하면 그냥 어떻게든 해 볼 수가 있는데, 이 성조가 표시된 성조가 있고 표시가 안 된 성조가 있는 데다가 성조 표시가 안 된 낱말은 자음 종류(자음엔 중, 고, 저 자음이 있음)에 따라 성조 계산하는 방법이 다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헛갈리는데 태국어를 모르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더 헛갈릴 것 같다.   아 힘들어!


우리처럼 성조가 없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정말 성조를 제대로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이 성조라는 게 우리가 '물'을 '불'로 발음하는 것 이상으로 태국 사람들은 성조를 틀리게 말하면 정말 못 알아듣는다.   글자가 같아도 성조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되니까 말이다.   더 많은 성조가 있는 말도 있다고 하니 5성 정도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단다.


그나마 태국어는 비교적 문법이 단순하고, 무엇보다 어휘 형태 변화가 없다는 큰 장점이 있다.   

'주어+서술어+목적어'라는 기본 형태가 평서문이든 의문문이든 큰 변화가 없고, 동사든 형용사든 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 형태가 언제나 똑같다.   즉 우리말처럼 '먹고, 먹으니, 먹어서, 먹을 거니, 먹었니...' 같은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복잡한 태국어에 어휘 변화와 시제 변화까지 있었다면, 아 이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모르면 모른 데로 그냥 즐기고 가면 되는 여행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훌륭한 업적 한국말과 글은 물론 K POP, 떡볶이, 한복 같은 우리 문화도 가르쳐야 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어 봉사단원의 삶은 이 어려운 태국어를 정말 꼭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공비와 사비를 들여 현지인 선생에게 태국어를 배우고, 유튜브 태국어 강좌와 오디오 클립을 시도 때도 없이 듣고 보고 그리고 모든 현지 상황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회화책을 사서 달달 외우고 살지만 여전히 태국어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태국어를 잘하려면 태국 사람처럼 생각하고 태국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내 방에 앉아서 알아듣기 쉽게 만든 유튜브 강좌를 듣고 있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내가 태국에 있는데 왜 한국에서 처럼 공부한단 말인가!   학교에서 마주치는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 매주 아침 시장에서 만나는 과일가게 청년과 야채가게 아가씨, 학교 가는 길에 타고 가는 썽태우 기사들!   이 살아있는 모든 태국 사람들이 내 선생님인데, 왜 책만 보고 노트북 모니터만 쳐다본단 말인가!


태국에서 대충 살다 보면 태국말은 어느 정도 대충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 아니다.    회화책도 달달 외우고 유튜브 강좌도 매일 보며 따라 하면 아무리 어려운 태국말이라도 금세 배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 아니다.

태국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일정을 세우면서 모든 상황을 태국말로 연습했다.   일어나자마자 TV를 틀어놓고 태국 뉴스를 들었다.  출근하면서 만나는 콘도 직원과 경비에겐 언제나 먼저 태국말로 인사하고 한 마디라도 꼭 얘기를 나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에게 일부러 아는 표현을 써보고 틀린 것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장에 가면 물건 사는 시간보다 상인들과 떠드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집 앞 길거리 식당에선 바쁜 주인에게 매번 음식 이름과 재료 이름을 물어보는 귀찮고 이상한 손님이 되어갔다.   집에선 30분이나 떨어진 배드민턴장을 찾아 회원가입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며 태국 현지인들과 어울렸다.    저녁엔 비록 한 페이지밖에 못 써도 꼭 태국어 일기를 쓰고 잤다.   좀 과묵한 편인 내가 태국에선 떠뜸거리며 말이 많은 수다맨이 되어갔다.


그래서 지금은 태국어를 어느 정도 하고 알아듣기도 한다... 고 말하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알아들은 척 하기, 눈치로 때려잡기나 정 급할 땐 몸짓 발짓 국제공용어로 말하기 신공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 태국어 완전정복의 길은 멀기만 하다. 


여전히 태국어는 나랑 안 맞는 것 같고, 이런 선생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태국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현지어는 현지인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몸으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생각은 쉽지만 이걸 실천하는 것은 사실 힘들다.   가뜩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남의 관심이나 간섭을 싫어하는 태국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말과 문화를 배운다는 게 말만큼 쉽지 않다.   


근처에 사는 동기 봉사단원에게 태국어를 잘 배우는 비법을 묻자 명답이 돌아왔다.

"꾸준히 열심히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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