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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Sep 16. 2023

지금 여긴 어디인가?

'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2장-3

<가끔씩 생각하지>

                                          노래 권인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가끔씩 생각하지

새롭게 변해가도 괜찮은가 가끔씩 생각하지     

문득 혼자 살고 싶어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바보처럼 살고 싶어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려 정신없이 세월은 흘러가고

지금 여긴 어디인가?     

예~ 예 예 지금 여긴 어디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아~ 아~ 아~   

  


  영월교육원에서 태국어도 배우고 현지 적응법, 건강 관리법 등을 배우고 있을 때, 태국에서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학교를 알게 됐다. ‘우돈타니 농업기술대학’. 코이카 단원을 처음 받는 학교라고 했다. 선임 단원이 없어서 학교 관련 자료는 코디네이터가 작성한 간단한 보고서밖에 없었다. 선임 단원이 있으면 살림살이도 물려받고, 살 집도 같은 곳으로 정하면 되고, 학교나 학생에 대한 정보도 알고 그래서 좋다고 하는데 좀 아쉬웠다. 더 아쉽고 정말 힘든 일들은 물설고 낯선 현지에 살면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서로가 처음이라서 우돈타니 농대의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도 다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로 열심히 하려다가 힘든 게 아니라, 그들의 무관심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되어서 무척 힘들었다. 

 

<본관>

  학교는 시내에서 좀 먼 곳에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우돈타니 시내에서 30분에 한 대 오는 썽태우를 타고 20분 정도 넝카이(라오스와 접경 도시) 방향으로 간다. 내릴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간다. (온통 논뿐인 외국의 낯선 풍경은 한 달이 지나도 어디가 어딘지 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말로 눈을 부릅뜨고 가다가 멀리서도 보이는 큰 노란 광고판이 있는 건축자재 마트 ‘두홈’ 건너편 육교 앞에서 내린다. 육교를 건너 두홈 주차장에 세워 둔 자전거(무단주차 시비로 경비원과 실랑이도 했다)를 타고 10분 정도 샛길로 가면 학교가 보인다. 그 길을 땡볕 아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교문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학교를 보면 정면에 본관 건물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어서 뭔가 대학 같은 느낌이 나지만, 그 건물 뒤로는 휑~하다. 농대답게 본관 뒤로는 온통 논과 밭일 뿐 건물은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학교 끝 쪽에 농기계 정비창과 양계장, 양돈장, 양어장과 말, 양, 염소 등등을 키우는 우리가 있다.  태국어 교육을 받던 ‘탐마삿 대학교’처럼 학교 안에 은행, 편의점, 이발관, 쇼핑몰이 있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우돈타니 농대는 어렴풋이 그리던 대학 캠퍼스와는 너무 동떨어진 그림이었다. 그곳은 넓은 논과 밭 사이로 1, 2층짜리 건물이 띄엄띄엄 있는 한적한 시골 고등학교 분위기였다. 

    

  태국의 대학교는 ‘마하위타야라이’와 ‘위타야라이’가 있다.

마하위타야라이는 우리나라 4년제 대학과 같고 위타야라이는 우리나라 전문대학과 같다고 보면 되지만, 영어로 College라고 쓰는 위타야라이는 우리와 좀 개념이 다르다. 위타야라이는 우리나라의 전문대학과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곳이라고 보면 거의 비슷하다. 흔히 기술대라고 하는 기술대, 직업대, 농대가 거의 위타야라이다.  2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했던 ‘우돈타니 농업기술대학’은 공식적으론 학생 수가 6백 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회(아침 8시쯤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를 매일 한다.) 때 보니 결석생을 고려해도 학생 수가 너무 적었다. 코워커에게 물어보니 실제론 3백 명 정도고 나머지 3백 명은 교도소에 있단다. 교도소? 놀란 눈으로 다시 물어봤다. 수감 중인 청소년 재소자 학생들이라고 한다. 정규 수업을 받지 못하는 수감 중인 청소년들을 이 학교 학생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농업의 나라로 알고 있던 태국도 산업화에 따라 농학 계열 학교 지원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의 지원금 등을 고려해 학생 수가 많게 보이려는 학교의 노력이 짠하게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전문대 2개 학년과 고등학교 3개 학년, 모두 5학년에 학생 수가 3백 명이니 한 학년에 학생이 60명 정도인 정말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학교 구경을 할 때 폐건물처럼 보이는 선생님 관사와 건물들이 많았다. 그 건물들은 학생 수가 줄면서 실제로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 건물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질러져 있는 책걸상 위로 거미줄과 먼지만이 가득했다. 코워커는 한국어 교실로 쓸 교실은 얼마든지 있다고 자신했다. 생뚱맞은 자신감! 지금 여긴 어디인가?    

     

학교 본관 뒤-넓은 논이 있다.

  학교가 다니기 힘든 촌구석에 있어도, 학생 수가 아무리 적어도 괜찮았다. 수업 후에 시원하게 마실 음료수 한 병 살 곳이 없어도 괜찮았다. 학교에 출근하느라 땡볕에 땀으로 목욕을 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 온몸이 다 젖은 채 자전거를 타고 가도 괜찮았다. ‘내가 언제 호의호식하고 대접받으려고 코이카 단원이 되었나? 봉사하러 왔으니 한국어 잘 가르치고, 우리 문화를 잘 전하면 되는 거지!’라고 수없이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수업에 학생들이 안 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태국어를 배우는 코이카 일정을 마치고 임지에 가니 학기의 1/3이 지난 때였다. 어쩔 수 없이 학기 중간부터 한국어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겐 그리 반가울 일이 없는, 학기 초엔 없던 과목이 갑자기 생긴 셈이다. 별 관심도 없는 외국어 과목이란다. 거기에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선생님이 가르친단다. 그때 학생들 마음이 어땠을까? 학생들 잘못은 없었다. 코이카에선 학기 일정에 맞게 단원을 파견해야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2학기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참 다양한 경험을 했다. 학생들이 정시에 오는 때는 없었다. 언제나 20~30분 정도를 기다려야만 했다. 학생들이 수업에 한 명도 안 오는 날이 많았다. 다양한 끼짜깜 (견학, 행사 등 특별활동)이 많았고, 한국어 수업은 끼짜깜보다 덜 중요했다. 

     

  어쩌다 수업을 하다 보면 그나마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이 하소연하곤 했다.     

“선생님! 배고파요 카.”

“선생님! 저녁 먹을 시간이에요 캅.”

“선생님! 염소 밥 주러 가야 해요 캅.”

여기선 한 과목을 2시간 연속 강의하도록 시간표가 짜여있는데, 웬일인지 한국어 시간은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이 낀 시간대에 배정돼 있었다.  학생들이 전부 다 출석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평균 출석률이 40% 정도였다. 딱 학생 1명을 데리고 개인 교습처럼 한국어를 가르친 날도 여러 번 있었다.    

 

  넓은 교정을 학생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간다. 수업시간표를 자세히 보니 강의실을 이동하는 시간은 고려돼있지 않았다.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도 아닌데 3교시가 11시 반에 끝나고 4교시도 11시 반에 시작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이 20~30분씩 늦게 올 수밖에…. 학생들 잘못은 없었다. 한국어 수업은 오후 4시 반에 시작해서 6시 반에 끝나도록 배정된 요일이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구내식당이 6시 반에 닫는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그러니 학생들이 학점도 없고 관심도 없는 과목에 아예 빠지거나 수업 중간에 밥 먹어야 한다고 항의(?)하는 게 당연했다. 한국어 수업을 그 시간에 배정한 학교가 문제지 학생들 잘못은 없었다.


  학생들이 한국어 수업에 한 명도 안 오는 날은 아이들이 동맹휴학을 하는 게 아니었다. 태국 학교는 수업만큼 다양한 행사(끼짜깜)가 많다. 또 이 행사들을 수업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문제는 아무도 나에게 행사 소식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 문제는 나중엔 반마다 똘똘한 연락책을 뽑아서 해결했지만, 그 연락책들이 수업 시작 10분 전에야 수업에 못 간다는 연락을 해주는 게 문제였다. 학교에서 정한 행사 때문에 한국어 수업에 빠지는 것은 학생들 잘못이 아니었다.   

  

  학생들 출석률이 낮아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너무 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 태국말을 너무 못하니까 아이들이 답답해서 안 오는 것 아닐까? 수업을 너무 재미없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이유도 분명 있었으리라. 허나 더 중요한 원인은 ‘한국어’ 과목이 그들 표현으론 ‘Activity’였기 때문이었다. Activity는 정규과목이라기보단 ‘특별활동’ 개념이다. 그 때문에 한국어 과목은 학점이 아니라 pass/non pass 만 주어지는 과목이었다. 또 non pass를 받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기도 하고... 그 결과는 비가 와서 빠지고, 너무 더워서 빠지고, 주중 연휴가 있는 주라서 빠지고(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주중 연휴가 있으면 대부분 집에 간다고 한다), 배가 아프다고 빠지고, 배가 고파서도 빠지고, 다른 수업 준비 때문에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또한 학생들 잘못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난 하염없이 학생들을 기다리며 읊조렸다. ‘지금 여긴 어디인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첫 학기를 기다림과 분노와 허탈감 속에서 보냈다. ‘지금 여긴 어디인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를 되뇌었다. 두 번째 학기를 보내며 원인을 찾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워커와 많은 얘기를 했다. 가끔 코워커와 태국어와 영어, 우리말을 섞어가며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있었다. 학교에선 현실을 다 알면서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오게 해 줘!” 

 “이건 너희 시스템 잘못이잖아!”

 “이러려면 코이카 단원을 왜 불렀냐구!”     

  결국 학장 면담을 신청했다. 너무나 바쁜 학장(학교보다 다른 곳에 주로 계심) 일정 때문에 면담은 못 했지만, 코워커를 통해 내 의사는 충분히 전달했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가 그 통한의 코로나가…. (자세한 내용은 후반부를 기대하시라! 하하하!)


  권인하 가수가 부른 ‘가끔씩 생각하지’를 혼자서 자주 불렀다. 학생이 한 명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에서, 갑작스러운 끼짜깜 때문에 수업을 한 시간도 못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블로그를 쓰다 말고 혼자 있는 방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이른 퇴직의 불안과 후회, 기대와 너무나도 다른 현실에서 오는 실망과 자괴감이 겹치며 가사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가끔씩 생각하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가끔씩 생각하지)

새롭게 변해가도 괜찮은가 가끔씩 생각하지   

(이렇게 살고 싶어 떠났는가 가끔씩 생각하지)     

문득 혼자 살고 싶어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문득 무얼 하고 있나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바보처럼 살고 싶어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바보처럼 살진 않나 그런 생각 가끔씩 했지)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려 정신없이 세월은 흘러가고  

(바람이 불든 햇볕이 나든 학생들은 한 명도 오지 않고)

지금 여긴 어디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예~ 예 예 지금 여긴 어디인가~~~   

(예~ 예 예 지금 여긴 어디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아~ 아~ 아~     

(나는 지금 무얼 하나 아~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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