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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Oct 16. 2023

죽어봐야 알아

"죽어봐야 알아."


송편 반죽을 펼치기 좋게 두 손바닥으로 동글동글 말면서 그녀는 말했다. "아침에 눈 뜨면서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적인 거. 자기들은 절대 몰라. 죽어봐야 알아." 죽어봐야 안다는 그 말이 여태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와닿았다. 그건 그녀가 죽음을 거쳐 살아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유방암 말기를 선고받고 한국에 들어가 1년간의 치료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녀는, 비록 가슴을 떼야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뛰는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게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야. 지금 삶은 덤이니까."


그녀가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고 한국에 들어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일 년 넘게 받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안식년으로 일 년 쉬로 들어가."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삶에 저런 여유가 있음이 오히려 부러웠다. 당시 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 그녀에게 우연히 연락이 왔다. 내가 김치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얼마 전에 담갔는데 먹을 복이 있네”라며 그녀는 순두부찌개, 비지를 비롯해 자신의 냉장고에 있는 반찬까지 몽땅 털어 가져다주었었다.


그녀의 음식을 격리 내내 먹었고 그 덕에 후유증 없이 깨끗하게 코로나에서 나을 수 있었다. 너무 고마워 식사 초대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하자 그녀는 안타깝게도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제대로 얼굴 보고 감사 인사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려 그녀가 한국에 있는 동안 몇 번 연락을 했지만 늘 한참 후에야 단문의 답이 왔다. 그녀가 좋은 시간을 보내느라 바빠 그럴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고, 그녀가 돌아올 때가 한참 지났어도 아무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차 지난달 한 행사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되었다. '뭐야 돌아왔는데 연락을 안 한 거야.' 순간 일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내게 온다 간다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나보다 20년 더 연장자인 그녀와 나는 한 단체에서 공부를 같이 하다 알았다. 그것도 한참 코로나 시기여서 매주 한 번 줌으로만 보다가 수업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번 만난 게 다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 바로 옆 동네에 산다는 이유와 남편과 같은 요리사라는 이유로. 아니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좋았고 친해지고 싶어서 혼자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연락이 없다고 서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행사로 정신없어 보이던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할 용기가 없어 행사가 끝나고 한 번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다 말았다. 그러고는 함께 수업을 들었던 다른 지인의 집에 얼마 후 초대받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10 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그 집에 전날 가져가서 내내 요리를 했다고 했다. 요리사인 그녀는 늘 그랬다. 그 덕에 우리는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으며 그녀는 작년에 아팠다고 지나가듯 말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걸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아프셨다고 하셨는데 어디가 아프셨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암에 걸렸었어."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에 쉬러 들어가셨던 거 아니세요?" 그제야 그녀는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알았을 때는 이미 암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는 걸. 한국에 암 보험이 들어져 있어서 치료를 위해 급하게 떠났던 거라고. 심지어 그녀의 남편과 엄마도 몇 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던 상황이었다.


"세상이 무너졌었어. 억울하더라고. 타국에서 수십 년 고생하며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암이라니.."


머리를 한데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때 왜 그런 말씀 안 하셨어요? 저는 안식년이라고 쉬러 간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 ”괜히 주변 사람들 걱정할까 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암에 걸렸다고 하면 친구들이 오히려 더 걱정하니까.“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온갖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다준 그녀는 당시 암 말기 선고를 받은 상태였었고. 앞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가망도 없이 길고 힘든 항암 치료를 받으러 떠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었다. “이거 먹고 깨끗이 나았으면 좋겠네.“




나는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녀가 힘든 투병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답장이 잘 오지 않는다고 즐거운 한국 생활에 정신없나 보다 생각했었고. 돌아와서도 연락이 없자 돌아오면 꼭 연락 달라고 했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는지 은근 서운해했었다. 왜 그녀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한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를 비롯한 주변의 다른 이들을 배려했고. 나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내 입장만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 완치는 아니지만 죽음을 겪고 온 그녀에게는 이전과 다른 빛이 났다. "죽어봐야 알아."라고 말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삶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꼼짝없이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고통스러운데 시간이 그렇게 안 가는 거야. 검사하려면 피가 필요한데 피를 너무 뽑아 더 이상 안 나와서 수혈을 받으면서 뽑았어.“ 혹시 재발하더라도 다시는 항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겠다며.


이미 추석은 보름이나 지났지만 우리는 함께 송편을 빚었다. 그녀의 진두지휘 아래 단단한 반죽을 다시 물렁물렁하게 누르고 펼쳐서, 그녀가 전날 견과류와 밤으로 만들어 놓은 건강한 속을 넣고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물결 모양을 냈다. 송편이 찜기에서 익는 동안 그녀가 가져온 7곡 나물을 팥밥과 함께 연신 감탄하며 먹었다. 설탕이 안 들어간 송편은 처음에는 생경하고 심심했지만 계속해서 먹게 만드는 묘한 맛이 있었다. 그렇게 든든하게 먹은 뒤 우리는 유방암 캠페인을 위한 7킬로미터 걷기 행렬에 합류했다.


"오늘 참여하려고 매일 집 근처 만보를 걸었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과 함께 트레킹을 떠나면 매일 최소 20킬로미터 이상을 걷는 게 익숙한 나로서는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녀에게는 매일 연습해야만 가능한 거리였다. 목적지에 도착해 말했다.. “제가 사진 찍어 드릴게요." "아휴 좋지"라며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 순간의 그녀를 사진에 남겼다. 사진 속 그녀는 빛나고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 살아있는 게 너무 행복해. 이제 내일 죽어도 후회는 없어."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죽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있다는 기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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