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못 할 길을 건너다.
12년 전,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재학 중의 일이었다. 학교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함께 연주하는 것이 관현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필수과목 중 하나였고, 건반악기 또는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성악과 학생들과 학교 합창단의 단원으로 함께하는 것과 피아노 전공의 경우 피아노가 포함된 실내악, 예를 들어 피아노 삼중주, 사중주 등 자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편성의 실내악 작품을 직접 공부하고 연주하는 것, 즉 혼자가 아닌 다른 음악인과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을 배우는 것이 학사학위를 수료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목 중 하나였는데, 학사과정 중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었던 시간 중 하나로 기억되는 실내악 수업을 위해 나를 담당한 교수는 피아니스트 필립 몰(Phillip Moll)이었다. 성악가 제시 노먼(Jessye Norman) 혹은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Sir James Galway)의 팬이라면 이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낯익을 거라 짐작되는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앨범 <Con amore>를 함께 발매하기도 한 거장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기쁜 영광이었다. 미국영어 억양이 강하지만 문법적으로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시며 나의 연주를 이미 들어보았다고 말씀하셨고,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서는 나에게 가곡을 다뤄볼 기회가 여태 없었다는 걸 알아채시어 레슨실 한구석에 자물쇠로 잠겨있던 작은 책장을 열어 악보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 악보는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를 가사로 한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나그네(Winterreise D 911)> 였다. 그 이후 우리는 한 학기 내도록 슈베르트의 음악을 감탄하느라 바빴고, 가사를 읽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학기 말에 가곡집 전곡을 무대 위에 함께 올리게 된 성악가 친구와 셋이서 몇 시간에 걸쳐 리허설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렇게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내가 가장 심도 있게 공부한 작품 중 하나가 되고, 작품을 잘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슈베르트라는 작곡가와 그의 작품을 찬양하는 팬이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나에게 좋아하는 가곡이 무엇인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분명 빼놓지 않고 언급했을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듣고 감상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로서 당시 겨울나그네가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눌러쓰고 있는 시간 또한 대단했는데, 그때 가장 자주 듣던 겨울나그네 음반은 테너 페터 슈라이어(Peter Schreier)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의 앨범이었다.
당시 나는 결코 피아니스트라는 핑계를 빌려 작곡가가 본래 의도했던 조성調性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테너의 해석만을 듣고자 했고, 세련됨이 돋보이는 이안 보스트리지(Ian Bostridge)와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Leif Ove Andsnes)의 음반, 어딘가 모르게 괴상하지만 끝없이 감상적인 피아노 파트를 구현해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과 함께한 피터 피어스(Sir Peter Pears)의 음반 또한 자주 들었지만, 슈라이어와 쉬프의 음반을 비교적 더 자주 들었던 이유는 가곡집의 열여섯 번째 작품 <마지막 희망(Letzte Hoffnung)> 때문이었다.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결국 나의 희망과 몸뚱이마저 바닥으로 치닫는다는 내용의 이 작품 중 반복되는 마지막 가사는 “내 희망의 무덤 위에서 눈물 흘린다”인데, 이 구절을 위한 슈라이어의 표현력을 단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 이 음반을 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간단하고도 미숙한 표현을 해보자면 ‘그의 절규를 들었고, 그로 인해 나는 슬픔에 잠겼다’라고 할 수 있겠다. 슈라이어와 쉬프의 해석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동시에 스물네 개의 가곡으로 이루어진 가곡집의 전체적 흐름과 방향, 일종의 형식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음악적 취향이 강한 데다 고집까지 센 어린 두 음악인의 리허설 과정에서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대화가 가능하리 만무했고, 결국 전체적 내용과 감정 전달이 부족한 대신 세부적인 기술적 면모가 돋보인 연주를 선보이며 당시 나의 겨울나그네는 막을 내렸더랬다.
물론 그 이후에도 겨울나그네 가곡집에 포함된 몇 가지 가곡들을 발췌하여 심심찮게 듣기는 했다만, 이 가곡집이 실연되는 공연장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대략 70분에서 80분가량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감상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 그러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는 것을 기회로 많은 음반을 찾아 듣던 도중 어느 한 앨범이 눈에 띄었다. 앞서 언급했던 ‘작곡가가 의도한 본래의 조성’을 고집하던 나의 소신을 몇 년 전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은 독일의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와 거장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의 겨울나그네 실황 음반이었다.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다 느껴지던 어느 무력한 하루의 오후에 이 음반을 듣기 위해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화성 하나하나를 위한 균형을 시작으로 전체적 균형을 가히 완벽으로 이루는 브렌델의 연주, 괴르네 특유의 목소리와 그의 섬세한 발음과 표현력에 감탄하며 한참 숨죽여 듣고 있자니 이 음반을 듣고 난 후 내가 고찰해왔던 겨울나그네의 전체적 흐름에 대한 의견이 바뀔 것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줄거리의 슈베르트 가곡집 <가을나그네> 중 열여섯 번째 작품 <마지막 희망>, 그중에서도 “내 희망의 무덤 위에서 눈물 흘린다”라고 두 번 반복되는 구절이 이 비극의 정점이라고 해석했던 내 생각이 괴르네와 브렌델의 음반을 감상하던 중 바뀌어버렸다. 절규에 가까운 슈라이어의 <마지막 희망>에 비해 절제된 괴르네의 해석에 의하여 나도 모르게 다른 정점의 존재를 의심했던 탓일까. 아니면 실제로 괴르네와 브렌델이 스무 번째 가곡의 절망적 성격을 극도로 표현한 것일까. 혹은 그 날 따라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이 나에게 와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겨울나그네 가곡집의 스무 번째 작품, <이정표里程標(Der Wegweiser)>의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못 할 이 길을 나는 건너야 한다”라는 내용의 마지막 구절은 <마지막 희망>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회피하고, 스스로를 황무지로 내몰며 ‘평안’을 갈구한다는 전체적 내용을 봤을 때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건넌다는 구절의 의미는 자신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을 인지한다는 요점이 될 수 있다. 겨우 붙들고 있던 희망 혹은 기대를 결국 의심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한 <마지막 희망> 대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희망 따위는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한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정표>가 바로 이 가곡집의 비극적 정점이 될 수 있음을 12년 전의 나는 알지 못했다. 가사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탓이거나, 스무 살의 나에게는 그저 지나치게 까마득한 슬픔이 부담스럽고 위험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간절함과 함께 안고 있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할 때의 슬픔은 끔찍하다. 하지만 희망마저 잃어버린 공허한 회색 빛 슬픔은 상상조차 두려울 만큼 더욱 절망적이지 않은가. 슈베르트의 작품이 전해주는 감동과 함께 희망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 그리고 그 존재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괴르네와 브렌델의 명연주에 감사하며 이 음반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May 2020 / Ber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