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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윤 Dec 14. 2023

독서 후기: The Curse of Bigness



얼마 전, 연구실 모임에서 팀 우(Tim Wu)의 "The Curse of Bigness: Antitrust in the New Gilded Age"를 선정하여 실원들과 함께 읽었다. 각자 읽어온 뒤 한 파트씩 맡아 발표하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 유익하고 좋았다. 교수님 말씀처럼,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부족할만큼 토론거리가 넘쳐났다.


대체로 즐겁고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심장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는데, 다른 분들은 그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는 점이다...ㅠㅠ 발표와 토론을 하는데 다들 생각보다 분위기가 차분해서, 사실 좀 놀랐다. 내가 예상한 건 이게 아닌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치 흥이 오르다 만 저녁 자리를 떠나듯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ㅎ


집으로 가는 길, 마치 이런 기분...


난 그동안 "Hipster Antitrust"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았다. 그런 표현은 조슈아 라이트(Joshua Wright) 같은 인사들이 리나 칸(Lina Khan) 같은 사람들을 폄훼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붙이는 딱지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모임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정말 뉴 브랜다이지언들을 "Hipster"로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말고를 떠나, 이들의 문제 제기 자체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거나 별로 흥미있게 보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니! 신기했다. 지난번에는 보크(Robert Bork)의 "The Antitrust Paradox"를 함께 읽었다고 하는데, 만약 내가 그때 참석했다면 오히려 난 심드렁하고 다른 분들은 흥미를 느끼고 그랬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에 내가 발표를 맡았던 부분은 서론(Introduction) 파트였다. 서론 파트는 분량은 정말 짧지만 내용은 깊이 있고 풍성해서 나는 준비하는 과정 내내 굉장히 즐거웠다. 서론에 책 내용이 모두 담겨 있어서 사실상 책 전체에 대한 내 생각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다. 실제 반응이 내 예상과 좀 다르기는 했어도..ㅎ 그래도 좋았다. 어떻든, 남들과 생각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이니까.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이 있다면 보실 수 있도록 아래에 내가 썼던 발표문을 옮겨본다. 논문같은 공식적인 출간을 생각하고 진지하게 쓴 글은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냥 재미로만 봐주시길 부탁드리지만... 그래도, 호옥시, 한 명이라도 내 글을 본 뒤"The Curse of Bigness"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갖게 된다면 좋을 것 같긴 하다 :) Cheers!




들어가면서      


2018년 출간된 팀 우(Tim Wu)의 “The Curse of Bigness: Antitrust in the New Gilded Age”는, 당시 플랫폼 기반 기술기업들(Big Techs)에 대한 경계심이 증가하는 배경 속에서 등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다.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쓰인 이 책의 영향력은 당시 미국 반독점법 학계를 넘어 전 세계 그리고 사회 전반으로 뻗어 나갔고, 거대 기술기업들에 대한 경쟁법 집행 강화 담론의 주요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GAFA”에 대한 규제 움직임에 그가 공헌한 바는 적지 않다.


물론 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기술 산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현대 미국 경제 전반에 걸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독과점의 폐해와 그 심각성이었다. 실제로 우는 2021년 3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ational Economic Council) 소속 기술·경쟁 정책 특보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미 경제 경쟁촉진에 관한 행정명령의 발포를 끌어내고,¹ 리나 칸(Lina Khan) 연방거래위원장과 조나단 캔터(Jonathan Kanter) 법무부 반독점국장의 임명에 관여하면서, 그의 관심이 미 경제 전체에 걸진 경쟁정책 강화에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² 현재까지도 그의 영향력은 반독점법의 변화 움직임 속에서 경업금지 약정 금지 규칙의 도입이나 기업결합 심사지침 개정 등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비록 2018년에 출간된 서적이지만, 우가 자신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밝힌 “The Curse of Bigness”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Source: Columbia Law School's Story Archive)


서론의 내용     


“The Curse of Bigness”는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크게 아홉 장(Chapter)로 이뤄져 있다. 팀 우는 아홉 장에 걸쳐 미국 반독점법의 도입 배경부터 부침 과정 그리고 현재까지의 역사를 한 번에 훑는다. 그러면서 그가 이해하는, 미국 반독점법의 정신과 취지 그리고 민주주의에서의 역할을 밝혀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 미국 사회가 처한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유효한 해결책 중 중요한 하나는 반독점법의 집행 활성화다. 그는 책을 통하여 현재 미국이 과거 극심한 불평등과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점철되었던 도금시대(Gilded Age)와 같은 위기를 다시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배경에는 반독점법의 집행이 약화하면서 만들어진 집중된 경제 구조가 있다고 보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반독점법 집행이 ‘다시’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을 도금시대로 표현한 것은 팀 우만이 아니다. 사진은 크루그먼(Paul Krugman)이 쓴 피케티(Thomas Piketty)의 자본론 리뷰. 제목이 ‘신도금시대’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서론(Introduction)은, 위와 같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고 그와 함께 긴 여정을 잘,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장이다. 열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이 안에 뒤에서 다뤄질 핵심 내용이 모두 담겨 있어서 서론을 읽은 이들은 누구라도 전체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14면부터 15면까지는, 현재 미국을 과거 도금시대와 같은 상황이라고 진단하는 부분이다. 우는 여러 산업에서 독과점이 등장하고 중산층이 감소하면서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격해지는 현재 모습이 꼭 과거 도금시대와 같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16면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현재의 고도로 집중된 독과점적 경제 구조가 시민들 간의 “rough equality,” 산업 자유, 민주주의, 확산된 부, 사업 기회의 감각, 그리고 독립적인 정부 및 시민의 삶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당연하게도, 우가 예정하는 답은 ‘아니다’이다. 그는 17면 이하에서, 지난 역사에서 미국이 반복적으로 확인한 헌법적 결단은 바로 “open and competitive market”의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하면서, 현대 반독점법 집행 원리의 중심을 차지해 온 “consumer welfare”식 접근을 극복하고 다시 법 집행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어 18면에서, 반독점법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넓은 다원적 목적관으로의 복귀, 새로운 형태의 마켓 파워 평가 툴 마련, 거시 경제적 영향 평가 툴 마련, 집중과 정치적 영향력의 관계 반영 툴 마련 등이다. 아울러 그는 경제학 및 기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활용할 것과 분할과 같은 강한 시정조치의 회복 및 법원의 태도 변화도 촉구한다.


우는 자신의 위와 같은 주장들이 독자들에게 다소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18면 마지막부터 19면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자신의 제안이 자유 방임과 국가 통제 경제의 가운데 위치하는 중도적 제안임을 강조한다. 즉, 서구가 20세기 중반 벌어졌던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바람, 대공황, 세계 전쟁 끝에 ‘경제정책의 재민주화와 재분배의 정치’를 선택하면서 번영과 함께 불평등의 감소를 누리고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위협을 잘 방어해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제안은 이때의 선택과 같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19면에서 20면까지, 그는 독점과 불평등 그리고 파시즘의 관계를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반독점법의 집행 강화를 외치는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에게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극단적 체제의 출현을 경계하는 목소리로서 이해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플랫폼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 경제 전반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기술 산업에서의 집중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21면에서, 그는 현재 문제의 심각성이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분야로서 기술 산업을 지목하고, 오늘날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거대 기술기업들의 존재와 그들의 우리 일상에 대한 영향력을 특히 경계하면서, 특별히 반독점법의 개입이 필요한 분야임을 강조한다.


이어 22면에서 23면까지, 그는 현재 미국에 번지고 있는 분노와 폭력을 다시 언급하면서, 무수한 문제점들의 근본 원인이 사적 권력의 집중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규 이를 직접 타깃할 수 있는 툴이 반독점법이며 앞으로 법 집행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서론을 마무리한다.     


(Source: VOA News)


생각거리들     


비록 분량은 짧지만, 서론에 담겨 있는 내용은 풍성하고 깊이도 있어서 ‘생각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다.


가장 먼저, 서론을 읽는 독자들은 과연 경제적 집중과 불평등 그리고 파시즘·독재가 어떤 관련이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론은 물론 글 전반에서 매우 필연적이고 불가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둘의 관계가 일반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와닿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팀 우도 관련 문헌을 인용하는 것 외에 특별한 논증을 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소수의 독과점 사업자들에게 집중되고 이들의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다. 이러한 불평등이 어떻게 파시즘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지만, 위와 같은 인식은 아마도 팀 우가 (책에서 ‘조건의 평등’을 설명하며 언급하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토크빌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고 그것이 탈취당할 때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평등에 있어서는 그 강도가 훨씬 크다. 평등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갈급하고 끊임이 없으며, 그 정도는 만약 평등을 찾지 못하면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 속에서라도 평등을 찾아 나설 만큼 크다. 토크빌은, 인간은 빈곤도 참고, 복종도 참고, 야만성도 참지만, 불평등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시민혁명이 민주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광기로 치달은 뒤 나폴레옹의 독재 정부 수립이라는 최악으로 귀결된 것은, 평등을 중심으로 혁명을 이끌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³ 만약 이렇게, 불평등이 인간의 평등에 대한 광적인 열망을 자극하고 이로써 오히려 예속을 추구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고 본다면, 팀 우가 불평등의 심화를 민족주의, 파시즘, 독재와 연결 지어서 그토록 경계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열정이 끊임없이 소멸과 부활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숙하고 정제되지 못한 열정이 앞으로 겪게 될 운명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열정은 그만큼 시들거나 질식되어 버리기 쉬우며 피상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시기에 평등에 대한 애착은 항상 원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우리의 가장 고귀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자유에 대한 열정은 계속 그 모습을 달리 했을 뿐만 아니라 사태의 추이에 따라 줄어들거나 커졌으며 강해지거나 약해졌다. 반면에 평등에 대한 열정은 줄곧 그 모습이 일정했으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완고하고 맹목적인 동일한 목적을 지향했다. 이제 사람들은 평등에 대한 열정을 충족해주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려 했으며 평등에 대한 열정을 조장해주거나 고무해 주는 정부라면 어느 것에나 그 정부가 전제주의로 나가는데 필요한 습성과 관념 및 법률들을 제공해 주게 되었다.⁴

  토크빌은 전술한대로 역사는 사회적 자유와 평등의 방향으로 흘러 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다. 인간은 자유에 대해서 본능적인 선호와 취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유를 추구하고 보존하고 이것이 탈취당할 때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평등에 대해서는 그 강도가 더욱 높다. 평등에 대한 열정은 열렬하고 갈급하고 끊임이 없다. 이들은 자유 속에서 평등을 찾는데, 만일에 평등을 찾지 못하면,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 속에서 평등을 찾게 된다. 이들은 빈곤을 참고, 복종을 참고, 야만성을 참지만 불평등의 귀족제도와 신분제도는 참지 못한다고 한다.
  자유의 가치와 효용성은 오랜 시일을 통해서 서서히 나타난다. 그리고 자유는 때때로 특정의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만 승화된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와 효용성은 바로 즉시 나타나고 지속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잔잔한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도 싫어하지만 평등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결국 사람들은 자유보다는 평등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때에 사람들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평등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평등을 보장해 주면 독재나 전제정부도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이 시민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평등중심으로 혁명을 이끌었던 점이다. 영국인이 자유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이끌었던 반면, 프랑스인은 평등을 중심으로 이끌었다. 전자의 경우 민주화의 속도는 느리지만 이성과 중용을 지니면서 서서히 진화할 수 있었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과격한 풍랑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독재정부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여론이야 말로 자유의 대의를 위하여 불의를 고발하는 인류의 배심원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토크빌은 중요한 내용을 지적한다.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을지라도, 자유 없는 평등의 상태는 평등 없는 자유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조정의 가능성을 미국 민주주의에서 찾고 있다.⁵


두 번째로 생각해 볼 부분은, 한국 독자의 시각에서, 팀 우는 정부 권력의 비대화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팀 우도 견제받지 않은 사적 권력과 정부가 결탁하여 독재 정부가 출현할 위험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탁과 별개로, 그의 글을 속에서 ‘반독점법이나 규제 권한을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정부’ 즉, 견제받지 않은 공적 권력(public power)에 대한 경계심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이는 독자들에게, 마치 연방 정부에게 강력한 집행 권한을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더 효과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준다. 경쟁법의 집행 원리들을 법치주의 관점에서 정부의 권한 통제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팀 우의 위와 같은 접근은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위와 같은 의아함은 아마도, 역시 잘못된 진단일 수도 있지만, 미국과 미국인의 의식 저변에 흐르는 특유의 ‘무국가성(statelessness)’이 미국 밖의 독자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국가의 박해를 피해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들의 이주에서 시작된 나라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면서 중앙정부의 권위적 질서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비록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적 권력 견제를 위한 정부의 강한 개입을 호소하는 팀 우의 주장은 필요한 행정 작용을 가로막는 무국가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밖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국가는 거의 언제나 강한 실체로 존재하였으며, 유럽인들이나 아시아인들은 그 오랜 역사에서 무국가성을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유럽과 아시아의 배경에서 그의 주장은 공적 권력의 견제 측면을 간과한 주장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면, 미국 상황을 배경으로, 그리고 미국 독자들을 상대로, 사적 권력 견제를 위한 정부의 강한 개입을 호소하는 팀 우의 주장이 미국 밖의 독자들에게 의아함을 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미국 행정에서 효율적인 관료제가 도입되는 것이 지체된 이유는 미국의 헌법적 전통에 기인하는 것으로 무국가성(statelessness)을 특징으로 한다(Stillman 1990; 정용덕, 1996a; Rutgers, 2001). 미국의 행정이론은 단일한 행정모델과 권력의 집중화를 거부하는 무국가성의 전통으로 특징되지만 유럽의 행정이론은 국가적 제도, 법, 일반적 이익, 사회 복지로 특징되는 국가성(stateness)으로 표현된다(Stillman, 1990).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은 유럽의 절대 왕정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로서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Montesquieu의 권력분립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회와 행정부, 사법부로 권한을 분산시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며 연방제를 통하여 각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헌법체제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아닌 의회정부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행정부를 통한 국가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사회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 의회정부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행정 효율성의 확보가 요구되었다(Wilson, 1885:294-296). 윌슨은 미국 헌법의 초안들이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엄격한 권력분립 이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정부라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관으로서 대통령과 의회 간의 친밀성과 협력을 곤란하게 하였으며 책임성을 모호하게 하고 효율성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한다(Wilson, 1908:56-57; Link, 1966:51-52). 권력의 분립은 과거의 비민주적 국가에서는 적절하였지만 대중 지배가 확립된 현 상황에서는 개인의 자유의 보호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해로운 무정부주의가 문제가 되었다(Kirwan, 1977:329). 윌슨은 미국의 당시 상황을 민주주의가 충분히 확립되어 정치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며 정치발전이 이루어진 민주국가에서는 유럽의 좋은 행정을 기술적으로 도입하여도 충분히 정치적으로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제적 관료제를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 것이다. ...
... 미국과 달리 한국은 조선시대부터 중앙집권적인 전통과 관료권이 강했으며 초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뒤처져 있는 현실 속에서 행정을 국가발전의 역군으로 적극 활용하였으며 강한 국가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국가성 자체를 경험하지 못한 국가에서 경제 발전을 통하여 국가기능의 더욱 확대되자 행정권의 강화에 대한 부작용이 문제되어 행정의 민주화를 통하여 지나치게 강한 국가성을 완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에서는 무국가성이 행정발전에 장애를 초래하였다면 한국에서는 경제발전 이후 지나치게 강한 국가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⁶


세 번째로 생각해 볼 부분은, 팀 우가 생각하는 반독점 또는 경제력 분산의 의미다. 서론에서, 나아가 책 전체에서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반독점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면 경제 집중을 방치하게 되고 경제가 소수에게 집중되면 이들이 경제는 물론 정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민주주의가 왜곡되고 사회 시스템 전체까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논리적으로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거꾸로, 반독점법 집행을 통해 집중이 해소되면 불평등이 줄어들고 민주주의가 회복될까? 분산된 경제는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물론 우가 반독점법만을 유일한 해결책,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독점법 집행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회복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그의 주장이 타당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반독점과 경제 집중 해소의 의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반독점과 경제력 분산은 무엇인가? 우는 왜 이들이 민주주의 부합한다고 보는 걸까?


그가 집중의 반대 개념으로 그리고 있는 반독점의 의미는 서론 15면에서 간략히 언급되고 있는 가치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고도의 산업집중과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을 열거하면서 반독점 또는 경제 집중 해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바로 ‘시민들 간 대략적 평등, 산업상 자유, 또는 민주주의 그 자체(“the premise of rough equality among citizens, industrial freedom, or democracy itself”), 광범위하게 확산된 부와 사업 기회에 대한 감각(“broad-based wealth and a sense of entrepreneurial opportunity”), 그리고 소수가 정부와 시민들의 삶에 과도한 영향력을 갖지 않는 상태(“influence over government and our lives”) 등이다. 즉, 강력한 반독점법 집행을 통해 경제 집중이 해소된 상태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위와 같은 가치들을 누릴 수 있게 되고, 당해 사회는 건강한 민주주의로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독점법의 집행 강화는 위와 같은 가치들의 회복을 의미한다.


과연 이들이 민주주의에 어떻게 공헌하는지 책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팀 우는 30면에서 토크빌의 “조건의 평등(equality of conditions)” 개념을 언급하면서 독자들에게 약간의 단서를 준다. 토크빌은 1830년대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 원인을 분석하면서 당시 미국 사회의 기저에는 유럽에서 찾을 수 없는 조건의 평등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즉, 유럽과 달리, 미국은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조건의 평등 상태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창출하는 역동성을 발휘하면서 '스스로 다스리는 사회'로서 민주주의 사회를 성공적으로 이룩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팀 우는 이렇게 토크빌이 강조한 ‘조건의 평등’에 주목하면서 미국 사회가 다시 강력한 반독점 집행을 바탕으로 조건의 평등을 되찾을 수 있으며 이로써 다시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시각이 미국 내에서 타당성을 갖는 것과 별개로 미국 밖에서도 의의가 있을지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지만, 독점과 집중을 조건의 불평등 문제로 진단하면서 반독점법의 역할을 조건의 평등 회복에서 찾는 그의 태도는 미국 반독점법은 물론 다른 나라들의 경쟁법 집행과 정책 설계에도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 토크빌 사상의 기본 원류는 인류의 역사는 평준화(egalitarianism)의 진행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유럽의 역사는 사회계급의 평준화(leveling of social ranks)로 인식되었다. 사회계급의 평준화는 일명 민주혁명으로 불리며 이것의 종착점은 조건의 평등화(equality of conditions)이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건의 평등 상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형성된 조건의 평등상태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인도하는 기본바탕으로서 모든 것의 출발점이요 동시에 모든 것의 종착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토크빌이 미국의 감옥 시설을 시찰하기 위해서 미국에 도착했을 때에 미국사회에 이미 조건의 평등이 확산되고 일반화 되어있는 상태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는 평준화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조건의 평등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조국인 프랑스의 혁명을 통해서 사무치게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⁸
... 토크빌이 미국의 여행기간 가장 충격적으로 느꼈던 것은 전술한 대로 미국 사회 구석 구석에 보편화된 조건의 평등이었다. 이 조건의 평등이 전체 미국 사회의 여론, 법 체제, 통치계급 및 일반백성에게까지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정부영역 못지않게 시민사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건의 평등화는 여론을 형성하고,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관행을 창출하고, 기존의 것들은 무엇이던지 변화시키고 수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건의 평등화는 여론, 제도, 관행 등 모든 것들의 기본바탕으로서 여타의 것들도 여기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는 종착점도 된다는 것이다.
  민주사회 내부를 들여다 보면, 초기에는 상하의 계급구조를 띤 두 개 부류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한 부류에는 돈, 힘, 여가, 고급스런 취향, 향기있는 위트, 예술에 대한 감상 등이 자리 잡고 있고, 다른 부류에는 노동, 촌스러움, 무지, 소박함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구성된 사회는 안정되고, 권력과 영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계급구조는 서서히 사라지고, 사람들을 분할시켰던 장벽들은 무너지고, 재산은 나누어 갖게 되고, 권력은 공유되며 지능의 불빛은 사회 구석구석에 확산되고 있었다.
  자유와 평등의식은 일상적인 삶속에서 익혀지고 뿌리내림으로써 민주주의는 견고한 터를 잡게 되어 결국 민주주의 제국(empire of democracy)은 평화스럽게 구축되어 갔다. 이들은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스스로 익혔지 어떠한 사상가나 철학가로부터 민주주의를 전수받지 않았다. 이 점이 프랑스와 다르다. 프랑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계몽사상가나 철학자 또는 문필가들로부터 관념적이면서도 피상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환상적이면서도 뜬 구름 같은 이야기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압제에서 벗어난 군중들이 환상에 가까운 민주주의를 현실로 적용하고 실천하려고 하였을 때에 민주주의는 폭력화됨으로서 프랑스 역사에 엄청난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토크빌이 미국사회를 ‘스스로 다스리는 사회’라고 명명한 바 있었는데 이는 이론이나 사상으로 배워진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념이나 이론 속에서 민주주의를 배운 것이 아니라 생활의 필요 속에서 민주주의를 익히고 내면화 시켜 나갔던 것이다.⁹


마지막은, 그가 기술 산업의 집중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 이유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과 이후 그의 행적들은 그의 우려와 관심이 미국 전 산업, 경제 일반에 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금융, 미디어, 항공, 통신 산업 등에서의 집중을 문제로 지적하면서도 그와 함께 기술 산업에 특별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일까? 서론에서 나오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특히 미국 시민들의 삶 속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거대 기술기업들의 존재는 어디에서나 확인된다고 하면서(“ubiquitous”), 이들은 “우리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고(“seems to know too much about us)”, “우리가 보고, 듣고, 하고, 그리고 심지어 느끼는 것에까지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seems to have too much power over what we see, hear, do, and even feel)”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이렇게 “소수가 모두에 대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과연 사람들을 실제로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지(who really rules, when the decisions of just a few people have great influence over everyone)”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즉, 이들의 힘은 단순히 거대하거나 정치·제도를 왜곡하는 수준을 넘어서,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독자들에게 미셸 푸코의 “bio-power” (‘생권력’ 또는 ‘생체권력’ 등으로 번역) 개념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오류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전근대 시대의 권력은 왕이나 군주에게 집중되어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근현대 시대의 권력은 사회의 다양한 기관과 구조를 통해 분산되어 행사되고 더욱 미묘하고, 내재적이며,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유명한 판옵티콘이 대표적이다. 판옵티콘의 비가시적 시선을 통해 죄수들은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하고 규격화하는데, 근현대 사회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모습은 마치 이러한 판옵티콘과 같다. 현대 사회의 시민들은 언뜻 독립과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감시와 규율에 노출된 상태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권력이 제시하는 틀에 맞게 규격화하고 살아간다. 그는 이렇게 근현대적 권력은 과거 권력처럼 죽음이나 해를 가하겠다는 위협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이나 존재 양식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행사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biopower”로 개념화하였다. 아마도 팀 우가 갖는 거대기술 기업들의 힘에 대한 특별한 경계심은 이렇게 푸코가 말하는 현대적 권력의 속성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서구에서, 거대기술 기업들의 권력이 푸코의 “biopower” 개념으로 묘사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책 결정권자들도 거대 기술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맥락에서 “biopower” 개념을 종종 언급한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 유럽연합의 경쟁법 집행과 정책을 이끌며 전 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했던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rethe Vestager) 전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플랫폼 규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 있다: “Obviously there can be an issue of biopower when you have a relationship where there is indeed a giant that sets their own terms and conditions, that would not be what you thought of neither in the spirit nor in the letter of the new copyright legislation”.10 즉, 현재 플랫폼 기반의 거대 기술기업들은 일반 대중들에 대한 밀접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들이 자신이 만든 규율대로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우려에서 규제적 접근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물론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 대한 규제 움직임이 반드시 위와 같은 동기에서만 촉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위와 같은 우려도 분명 플랫폼 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주요 동기 중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플랫폼 규제 논의도 단순히 시장 경쟁보다 근본적 시각에서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Source: Euractiv)


나가면서      


얼마 전 한 리서치 센터의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이 눈에 띄게 단수 답변으로서 돈, 즉, “물질적 안녕(material well being)”을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가치로 답변했다는 결과가 나와 세간의 이야기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것은, 방법론과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변의 한국인 대부분이 크게 놀라지 않고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소 자조적인 반응이었기는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그것이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태도에서 나왔든 물질적 조건의 결핍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태도에서 나왔던 것이든 흥미롭다.


지금 한국 사회가 과거 비인간적인 물질만능주의와 약자 혐오의 사회진화론이 팽배했던 미국의 도금시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러한 평가를 위한 전제로서 (비교적 객관적인) 집중도와 불평등도를 따지는 것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작업과 평가가 전제된 상황이라면 모르겠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팀 우 교수와 같은 시각을 공유하는 미국 학자들의 논의와 주장을 그대로 한국에 성급히 적용하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논의가 보여주는 통찰에 대해서는 우리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현대 한국 사회는 토크빌이 말한 ‘조건의 평등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도, 다른 방식이라도, 우리는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한 민주적인 사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한국의 경쟁법 집행과 경쟁 정책은 한국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The Curse of Bigness”는 비록 2018년,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출간된 책이지만, 글을 읽는 누구에게나 위와 같은 중요한 질문과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1) 해당 명령을 통하여 바이든 행정부의 경쟁정책에 대한 선명한 지향성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이 제시되었다. 해당 명령서에는 예컨대 현재 이뤄지고 있는 경업금지 약정(non-compete clause) 금지 규칙의 도입이나 기업결합 심사지침 개정 작업 등에 관한 계획들도 담겨 있다. White House, ‘Executive Order on Promoting Competition in the American Economy’ (Jul 9, 2021) <https://www.whitehouse.gov/briefing-room/presidential-actions/2021/07/09/executive-order-on-promoting-competition-in-the-american-economy/>; ‘How to Change 40 Years of Policy in 22 Months: Professor Wu in Washington’ Columbia Law School (Feb 8, 2023) <https://www.law.columbia.edu/news/archive/how-change-40-years-policy-22-months-professor-wu-washington>. 

2) Ben Remaly and Davide Mamone, ‘Tim Wu: the exit interview’ Global Competition Review (Jan 24, 2023) <https://globalcompetitionreview.com/gcr-usa/article/tim-wu-the-exit-interview>.

3) 백완기,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생애와 사상’ 행정논총 제53권 제4호, 2015 (“백완기(2015)”), 16-19면.

4) 알렉시 드 코트빌, 이종훈 역,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160면 (백완기(2015), 18면에서 재인용.

5) 백완기(2015), 18-19면.

6) 유현종, 'Woodrow Wilson, 박동서, 그리고 한국행정' 행정논총 제51권 제3호, 2013. 9, 41-43면.

7) 실제로 팀 우는 한 강연에서, “The Curse of Bigness”를 집필하면서 토크빌의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다음 링크에서 강연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해당 부분은 14분 58초에서 언급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kg41tOGzjg> (접속일: 2023. 12. 9).

8) 백완기(2015), 8면.

9) 백완기(2015), 30-31면.

10) Samuel Stolton, 'Vestager takes aim at ‘biopower’ of tech giants' (Euractiv Nov 20, 2019) <https://www.euractiv.com/section/copyright/news/vestager-takes-aim-at-biopower-of-tech-gi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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