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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안톤 May 23. 2021

10년마다 꾸는 꿈

100살까지 살고 싶습니다

서랍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제법 긴 머리와 구릿빛 피부에 뱃살이 없는 것을 보니, 대학에서 운동하던 시절인 것 같았다. 울산 동구에 있던 숙소 근처 바닷가에서 손가락으로 V를 그리고 있었다. 사진 속 나는 젊었으나 촌스러웠고, 치아가 7개쯤 보이도록 활짝 웃고 있지만 예쁘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삶에서 축구를 빼면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스물이라는 나이는 이제 술집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설렘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혼란과 불안도 함께 선물했다. 나는 빨리 나이를 먹고 서른이 되고 싶었다. 훌륭한 축구 감독이 되어 돈도 많이 벌고, 멋진 차도 끌며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에 내 돈을 원 없이 쓰면 그만이었다. 그게 내가 바라고 꿈꿨던 30대였다.


30대의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내 상상과 달리 (많은) 돈도, (내) 집도, 차(면허)도 없었다. 그래도 인생의  큰 파도를 만나 축구선수에서 ‘직장인’이 되었으니 수명이 짧은 여자축구계에서 가히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비 맞으며 운동 안 해도 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며 사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실력으로 매달 마약 같은 월급만 기다리는 것은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돈도 많이 버는 한 손에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성공한 도시 여자,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이왕이면 차가운 도시 여자가 좋겠다.

40대가 되었다. 많은 돈은 없지만 혼자 살기에 부족함도 없다. 통근버스와 지하철이 익숙해져 운전은 포기했다. 결혼을 안 해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면허 좀 따라는 잔소리가 더 많다. 어느덧 회사 내에서 지위가 생겼고, 스타벅스 커피와 함께하는 출근은 아니어도 직원들과 여유롭게 티타임도 갖는다. 차가운 도시 여자를 꿈꿨는데 쓸데없이 배만 차가워서 얼마 전부터 한약을 먹게 된 것이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남들처럼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고 나름대로 해소하며 산다. 어쩌면 20대와 30대에 상상했던 모습은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만족과 행복처럼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비교한다면, 대체로 만족스럽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뱃살도 풍족해질 줄은 몰랐다.


40대가 되면서 조금씩 은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10년도 더 남은 얘기를 벌써 하나 싶다가도 한편으론 10년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다. 1년이 지나가는 체감속도를 봤을 때 더욱 그렇다.


은퇴와 노후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무거운 숙제다. 당연히 무엇을 해야 하고 준비해야 될지 답을 찾지 못했다. 퇴직금 모아 치킨집을 차리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킨집은 많아도 너무 많다.


매달 적지 않은 국민연금이 월급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월급 명세서의 ‘국민연금’ 항목은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사실 노후에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아깝다는 생각과 억울한 기분이 단전에서부터 밀려올 때면, 내가 낸 돈으로 우리 부모님이 연금을 받으시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은 편하다. 은퇴 후 삶을 위해 믿을 건 저축과 보험이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것뿐이다. 내 주변인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결혼한 친구도, 혼자 사는 동료도 같은 고민을 한다. 같이 모여 은퇴 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닭가슴살과 고구마를 같이 먹은 것 같은 퍽퍽함이 느껴진다.

한편으론 서글픈 마음도 든다. 요즘 환갑은 잔치도 안 한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60대 직장인은 찾을 수가 없다. 외국처럼 백발이 성성한 개발자가 현역에서 근무하는 것은 멀고 먼 이야기다. 퇴사가 ‘용기’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은퇴도 무조건 ‘정년’에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다시 50대의 나를 꿈꾸기 시작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해야겠지만,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초점 안경을 낀 채 지금처럼 생각나면 글도 쓰고, 다른 사람도 조금 더 포옹하는 행복한 사람.







노후는 준비고, 은퇴는 설계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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