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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style Apr 08. 2024

실패의 대가는 권고사직

회사문화 답사기 시리즈 20화

1조 원 매출달성의 환호를 나눈 지 일 년도 안되었는데 사내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회사가 곧 망할 거라는 거였다.

자회사가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하고 몇백억의 적자채무가 발생했고, 미국으로 야심 차게 수출했던 보급형 PC 수만 대의 양판점 반품으로 수출형 모델 재고로 가득 차고 넘쳤다.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자리 잡았던 사옥을 매각하고 안산 공장으로 헤드 오피스를 이전하고 모든 세일즈맨들은 안산 출퇴근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흔들리며 망해가는 대기업에서 마지막까지 남을 것인가? 이직을 할 것인가? 고심하던 차에 잘 알고 지내던 컨설팅 대표님의 소개로 제조중견기업 마케팅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업 30년이 넘은 수백억 매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욕실용품 제조전문기업이었다.


창업주 2세 대표 취임 후 경영선진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컨설팅대표가 연간 계약으로 함께 일하고 있는 기업이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기업규모의 차이에 따라 연봉은 내려갔다.

위안삼은 것은 마케팅커뮤니케이션과 유통기획업무를 총괄하는 업무였다.


기존 유통기획팀 직원은 두 명이었고 세일즈팀 직원이 다섯 명이었다. 기존 영업관리를 총괄하는 임원 한 분을 더하여 본부 조직은 신설 마케팅 임원인 나를 포함하여 총 아홉 명이었다.


나는 두 명의 유통기획 직원과 새롭게 론칭 준비 중인 비데 마케팅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유통촉진 프로그램을 동시에 기획하고 실행에 옮겨 나가기 시작했다.


비데 마케팅을 위해 광고 론칭기획을 하였고 당시 비데는 고급 아파트를 중심으로 서서히 보급되고 있는 초기 시장이었기에 차별화된 기술이 적용된 우리 회사의 비데 콘셉트를 '청결함과 고급스러움'에 중점을 둔 CF를 론칭하기로 결정하였다.

광고는 잘 만들어졌고 당시 국내 최초로 비데 CF를 내보낸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공기방울 비데'


가격전략은 고급스러움과 차별화된 기능을

등에 입고 고가전략으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통상적인 비데가격의 세 배로 책정했다.

강남 사모님 댁과 성북동 회장님 댁과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 럭셔리 홈을 꾸미는 구매자를 대상으로 판매가 될 것을 예상했다.


모든 판매는 유통점을 통해서만 판매하기로 하고, 고가 비데 판매는 주간단위로 실판매 수량을 확인하고 볼륨 인센티브가 아닌 실판매 인센티브를 높게 책정해서 지급하기로 했다. 전국 유통점을 모아서 신제품 비데 설명회와 판매정책 발표회까지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수억의 광고비를 집행하고 수개월이 지났다.

신제품 비데의 판매는 부진했다.

석 달 동안 이삼백 대 수준으로 계획대비 30%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박살이 난 거다.


원인분석을 해보았다.

☞시장을 외면하고 계획만 밀어붙였다.

시장은 고가의 비데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데 구입고객은 실사용자 수요는 10% 미만이었고 50% 이상이 아파트 옵션시장으로 건설사를 대상으로 한 B2B저가입찰수요 시장이었다. 나머지 40%는 민간 중소형 건축업자와 욕실공사를 제공하는 용역서비스업체 시장이었다.


당시 월 2~3천대 남짓한 총 시장규모에 고급비데(일반모델대비 3배 고가품)를 월 3백대씩 팔겠다고 세운 마케팅계획 자체가 무리했던 것이었다.


☞무리한 고가전략을 밀어붙였다.

비데 노즐 분사기술을 일본 특허를 들여와서 적용하였고 실재 공기방울 분사방식으로 신체접촉에 무리가 없이 품격 높은 청결함을 제공하는 것을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기술 하나 외에는 디자인이나 추가 기능에서는 차별화가 거의 없었으므로 외관디자인만으로는 통상적인 제품대비 세 배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스러웠다. 판가는 CEO의 결정이었다.

고객은 동일한 조건에서 욕실공사 구성품 중의 하나인 비데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지부진하게 반년이 지나갔다. 회사에서는 도기사업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임원 두 분이 합류했다. 한 분은 제조책임자로 중국협력공장을 세팅하고 기술개발과 제조공정을 관리하는 도기제조 기술자였다.

한 분은 유통영업 전문가로 도기판매계획을 총괄하고 세일즈팀을 총괄했다.


작은 기업의 헤드오피스에 임원만 네 명.

더군다나 유통총괄 임원은 새로운 영업인력을 몇 명 추가 채용하면서 세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존임원과 두 명의 직원과 함께 비데 마케팅 역할만 담당하는 것으로 업무가 제한되었다.


욕실용품의 특성상 광고홍보마케팅은 그리 비중이 높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직무였다.

제품카탈로그 정도만 있으면 충분한 판매홍보를 할 수 있었고 유통점에 대한 일반관리와 점주관계관리만 단단히 하면 매출은 어느 정도 유지되는 시장이었다.


고급비데의 마케팅 실패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성과창출 방안이나 역할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기제조 담당 임원의 역할이 실질적으로 회사에 필요한 자원이었고, 유통총괄로 온 새 임원이 핵심업무를 장악한 것이었다.


겨울이 왔다. 이직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유통총괄 임원으로부터 오너가 나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 분위기로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오너 CEO와 형식적인 면담을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이른 아침 주간임원회의를 마친 인천공장의 CEO집무실 소파에 대면했다.

임원계약해지에 유감을 표명하며 삼 개월 위로금을 제시하는 CEO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고 마무리했다.


임원계약 해지는 이미 고급비데 마케팅 성과부진 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임원의 등장과 함께 부분적이나마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불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당해 보는 비자발적 퇴직이어서

자존심은 상했다. 잘못된 이직 선택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후 이직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지침을 가지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인가? 연봉에 구애받지 말자.

☞할 수 있는 일인가? 기한에 구애받지 말자.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직무를 구체화하자.

☞사람을 조심하자! 진심보다 중요한 건 사실.

☞반드시 회사에 성과를 보여주자! 목표합의.


첫 권고사직의 추억을 만들어 준 R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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