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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작 Jun 02. 2023

영화 클래식,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전부 클래식하다


내게 인생영화는 딱 5가지 정도이다. 1.클래식 2.지금만나러갑니다 3.뷰티인사이드 4.러브레터 5.플립 (딱히 순위대로 매긴 것은 아님) 이렇게 적고 보니 거의 다 첫사랑에 관련된 영화라는 것을 알고 소름이 돋았다. 딱히 그런 연유로 좋아한 것이 아닌데..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한 내가 첫사랑을 품고 있는 영화들을 인생 영화로 꼽다니...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실소가 터진다.


2017년 곽재용 감독과 함께한 클래식 GV에서 손예진은 20대 초반 필모에 담겨 있는 <클래식>과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버금갈 정도로 좋은 멜로 영화를 꼭 찍고 싶다고 했었다. 당시 그녀가 14년 만에 선택한 멜로 영화는 바로, 일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나의 인생 영화는 일본 원작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기도 했고 손예진의 작품 중 하나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아주 재밌게 보았는데... 아무튼 손예진의 멜로 감성이 나의 감성을 취향 저격하는 것은 신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담이다.    


14년 만에 다시 열린 <클래식> GV / (클래식의 손예진 배우, 곽재용 감독)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옆집 아주머니가 비디오방에서 빌려온 비디오를 한번 보라고 빌려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라... 이 영화를 처음 접했던 시기와 그 시기에 느꼈던 감정들을 되새겨보아도 클래식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감히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수작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비디오를 돌려주지 않았고 몇 번을 더 보았고 연체가 되었었다.


그 당시에는 인기가 많았던 조인성이 너무 멋있어서 조인성에만 눈이 들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클래식>하면 잔상처럼 떠올려지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준하(조승우)의 가슴 먹먹한 미소일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의 멜로영화 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현재의 어느 날,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의 전주를 듣자마자 또다시 클래식을 봐야 할 시기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집에 있는 날 각 잡고 티비 앞에 앉아 나의 소중한 보물 같은 영화 <클래식>을 틀었다.



정말 좋아하는 인생작품들을 보면 사소한 것 하나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원래 어떤 작품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그 작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게 나만 그런가? 그래서 이 영화를 N번째 본다. 뭐 어쨌든 리뷰를 쓰고자 영화를 어느 때보다 꼼꼼히 보게 됐다. 만약 몇 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오랜만에 마주할 전율'을 고스란히 느끼지 못할까 봐 조금 걱정스럽다. 내 나쁜 기억력을 믿어보자.


매번 어느 나잇대에 보는지에 따라 클래식을 보는 관점도, 느낌도 전부 다르다. 어느 날에는 조승우가 연기한 준하가 너무 짠해서 슬펐고, 어느 날에는 '손예진의 대표 멜로 영화는 클래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날에는 '아 이런 장면도 있었지?'였다. 이번에는 어른에서 어른으로 가는 과도기에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울린 이 스토리에 무한 감탄과 존경심을 느꼈던 것 같다.



1. 우연에서 필연으로… 그리고, 약속의 증표 목걸이


클래식의 대표 포스터 상단에는 '우연히, 우연히, 우연히... 그러나... 반드시…(잊힌 약속이 깨어났다)'라고 적혀있다. 문구 그대로 해석하면 3번의 우연, 1번의 필연이다. 그래서 나는 이 리뷰를 쓸 때 3번의 우연과 1번의 필연으로 항목을 나눠 봤다.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의 우연은 지혜(손예진)와 준하(조승우) 사이의 공통점이다. 첫 번째 우연은 지혜와 준하 모두 처음엔 진심 앞에서 망설인 것. 두 번째 우연은 그 진심을 드러내자 결국 통한 것. 세 번째 우연은 단어 그대로 우연을 말한다. 준하와 주희의 사랑은 결국 우연처럼 스쳐 지나갔다는 것, 더 정확하게는 이별이 우연처럼 찾아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는 필연을 이야기했다. '잊혀진 약속이 깨어났다.' 준하와 주희 사이에는 서로 주고받는 편지도 물론 자주 등장하지만, 목걸이가 이들의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는 대표적인 소재다. 주희가 처음 강가에서 고마움의 보답으로 목걸이를 선물하였고, 준하가 이별을 말할 때 그 목걸이를 다시 돌려주기도 했다. 목걸이는 사랑의 시작이었다가 이별이 되기도 했다. 준하를 전쟁터로 보낼 때도 주희는 살아 돌아오라며 자신의 목걸이를 준다. 목걸이에 내재된 의미는 여기서부터 서로 간 약속의 증표가 되었다. 준하는 주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걸이를 목숨처럼 여겼고, 그 약속을 지켰다며 주희에게 돌려주려 하지만 주희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최후의 약속으로서 목걸이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잊혔던 그 약속이 상민(조인성)과 지혜(손예진 1인 2역)로 하여금 깨어났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목걸이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목에 채워진 것이다. 이번에도 물론, 사랑에 대한 약속의 증표로서 말이다.




2.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하지만 잊지 못할 사랑이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공식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깨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보편적인 공식이 깨질 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클래식에선 상민과 지혜로 인해 주희와 준하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첫사랑을 대신(?) 이루어준다는 설정은 공식이 깨졌을 때의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또한 못다 한 사랑이 후세에라도 이루어진 것에 감명받는 분위기는, 그만큼 사람들이 클래식한 감수성의 환상에 젖어있다는 방증 아닐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환상을 안고 살아갈 자유는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런 류의 감상은 누군가에겐 충분히 부정적인 측면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태수(이기우)와 결혼했음에도 준하를 절대 잊지 못했다. 준하도 마찬가지로 죽기 전까지도 주희를 그리워하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상민을 낳았다. 현실적으로 보면 서로의 배우자에게 감히 못 할 짓 아닌가? 그리고 내가 상민과 지혜처럼 그들의 자식으로서 내 엄마 아빠의 지난 과거 첫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것도 보통 스토리가 아닌 아주 애절하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랑 이야기 말이다. 나는 지금은 상관없지만 어릴 때 엄마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인간이란 야비해서 현실이 조금이라도 힘들면 "그때 그랬어야 하는데!"라는 후회를 한 번쯤은 할 수 있을 것임을 겁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준하가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할 때 주희가 배웅하며 오열하는 장면에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깔린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中'


사랑해서 행복했던 기억들과 느낄 수 있었던 감사함이 있다. 그렇지만 너무도 불행했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묻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더 큰 불행이 자란다. 그리움은 내색하지 못한 채 치유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반드시 묻어버려야 한다. 가슴속 깊이 말이다. 준하는 죽기 전까지 그랬을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준하는 죽음으로 사랑을 묻었다. 하지만 주희는 살아가면서 묻어야 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행복했는데 행복했다고 왜 말하지 못하지? 그리운데 그립다고 왜 속으로 삼켜야 하지? 결국 모든 게 너무 아픈 사랑 때문이라면 어이없지 않은가? 사랑이 사랑을 아프게 하다니. 이는 너무 잔인하고도 가혹한 우리의 진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기 해석에 불과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내 의견은 그렇다. 지혜와 상민은 치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엄마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누구보다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됐을 지혜와 상민이 엄마와 아빠의 묻어버려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랑에 대해 이젠 슬프면 슬프다고, 행복했다면 행복했다고, 그리우면 그립다고 외쳐도 된다고 다독여준 것이 아닐까? 어쩌면 엄마 아빠와 달리 자신들은 첫사랑을 꼭 이루겠노라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지혜가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주희의 편지 상자를 열어본 것은 뜻하지 않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결국 필연이기 때문에 상자는 열린 것일 테다.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오랜 사랑을 딸 지혜가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준 것이다.



3. 결국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전부 클래식하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촌스럽다고 한다. 2003년 작품이기에 당연히 촌스럽다. 그리고 배우들이 직접 말한 것처럼 신인 특유의 어색한 연기 톤과 표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도 비교적 옛날이기에 지금이랑은 달리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를 띄기도 한다.(그렇지만 손예진과 조승우 배우는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감정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는 촌스러운 건 연기 톤뿐만이 아니라 클래식하고 진부한 설정 때문이라며 이 영화를 유치하다고도 평가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왜 클래식일까? 1960년대 옛날 사랑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에? 영화 내내 OST에 클래식한 음악들이 많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아니면 말 그대로 첫사랑을 다룬 클래식한 소재의 영화이기에?


클래식의 제목이 왜 클래식일지 생각의 나열을 해봤다. 1960년대 그 옛날, 소년과 소녀의 클래식한 사랑 이야기가 현재에 놀라운 기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주희의 낡고 클래식한 상자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집안의 반대와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서 놓아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의 증표라고 준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시간이 지나도 평생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지금에 이런 사랑이 있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단한 사랑 이야기 납셨다고 하겠다. 아주 오글거리고 고구마에 사이다가 필요하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 앞에선 모두 바보가 된다고 했다. 사실이다. 사랑하면 사람 자체도 클래식으로 변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말도, 모두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뻔해진다. 그러니 적어도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본 사람들은 준하와 주희의 사랑을 촌스럽다고 괄시하지 말자. 결국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전부 클래식 해질 테니까. 가장 기초적이고 순수하면서도 소중한 어떤 감정들 말이다.



이제는 1990~2000년대 초반의 순수하고 몽글했던 감성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고들 종종 말한다. 나만 해도 요즘 노래는 왜 옛날 발라드만큼의 감성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요즘 영화는 왜 다 자극적인 영화만 나오는 거지?라고 투덜대니까.


이런 이유에서 영화 <클래식>이 앞으로도 영화팬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란 장담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입 밖으론 촌스러운 게 싫다고 투정 부리면서도 내면만은 여전히 클래식하길 바랄 것이다. 두고두고 꺼내어봐도 절대 질리지 않는 그 옛날 아름다운 이야기 속의 감성을 꾸준히 그리워할 것이다. 그럴수록 이 영화의 퀄리티와 가치는 더욱 향상될 것임이 틀림없다. 앞으로 영화 <클래식>이 마치 이름값을 하듯 몇 년이 지나도 한국 최고의 멜로영화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사실에는 단연 변함이 없을 것이다. 클래식이란 조승우의 먹먹한 미소처럼 새하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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