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 1100 고지 습지
제주에 입도한 지 13일째, 그날의 날씨는 하루 종일 흐림. 그럼에도 무더위는 여전했다. 더위를 피해 한라산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해발 고도가 1100m라고 해서 1100 고지라 불리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1100 고지로 향하는 도로는 제주도 대표 드라이브 코스이자, 은하수를 찍을 수 있는 별 사진 명소로 알려져 있다. 올라가는 길부터 보이는 나무들이 심상치 않다. 높이가 쉽게 가눔 되지 않는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 숲을 이루는데, 그 숲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가? 그리 덥지 않았다.
1100 고지에는 작은 휴게소와 사슴동상으로 유명한 고상돈 공원,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1100 고지 습지가 있다. 람사르 습지는 생태,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습지를 범국가 수준에서 체계적으로 보전하고자 1997년 이란의 람사르 (Ramsar)에서 채택된 협약이란다. 1100 고지 습지는 제주도에 등록된 5곳의 람사르 습지 (물장오리오름, 동백동산습지, 물영아리오름, 숨은물뱅듸, 1100고지) 중 하나이다. 이곳은 전체 습지의 일부를 따라 나무데크로 보행로를 만들어 걷기 편하게 습지를 즐길 수 있다. 전체 경로가 15~20분 걸리는 거리라 부담도 없다.
1100 고지 습지에는 물이 흐르고, 현무암 사이로 연둣빛 풀과 초록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현무암으로 보이는 돌들에는 지의류로 덮여 검은 색이 아닌 회색 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의류는 이끼류와 엽록체를 가지는 조류들이 서로 모여 공동체를 이룬 독특한 생물군인데, 지면을 따라 옷을 입히듯 덮여 분포하고 있다고 해서 지의류라고 불린다. 지의류는 북극권 툰드라 지형이나 건조한 사막 같은 극한에 지역에서도 살 수 있다는데,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개체처럼 공생하면서 살아간다는 신비한 생명체이다.
지의류의 공생을 상상해 본다. 날 때부터 함께 했다고는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 둘의 차이는 짐작해보자면, 남녀 간 성별 차이보다 인간과 원숭이만큼 큰 차이려나?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싫어하는 것도 서로 다르지 않을까. 그럼 그들도 우리처럼 살아갈까? 서로 보며 웃음 짓다가, 가끔은 얄밉다가, 투닥거렸다가 위로도 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그러다 극한의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똘똘 뭉쳐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 것 같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평안하고 넉넉한 때에는 혼자서도 거뜬하다. 오히려 신경 쓸 상대가 없으니 편하다. 그러나, 마음이 위태로운 상황이나 부족한 때라도 곁의 사람이 의지가 된다. 서로 힘껏 보듬고 있으면 없던 힘도 보태지는 느낌이다. 우리도 지의류의 공생처럼, 당신과 함께라면 갈 수 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찾은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든다. 오늘도 자연에서 공생의 지혜를 배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