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의 강연을 듣던 영국인 여학생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강연이 끝나고, 그녀는 에딩턴과 악수하며 앞으로 훌륭한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말을 건넸다. 에딩턴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원했지만, 자기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이 ‘지금까지 천문학 분야에서 가장 천재적인 박사 학위 논문'이란 평가를 받은 학자가 될 거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세실리아 페인 본인 역시 알지 못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왕립 천문학회에 참여한 페인은 아서 에딩턴만큼이나 감명적인 강연을 들었다. 그 강연자는 바로 하버드 천문대장인 할로 섀플리였다. 강연이 끝나고 섀플리를 만난 페인은 ‘미국에서 교수님과 일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당시 영국에서 과학을 전공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과학 교사 정도였기 때문이다. 섀플리는 농담 삼아 ‘애니 점프 캐넌이 은퇴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되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페인은 미국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페인이 섀플리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페인은 마흔이 넘어서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1년 뒤인 1923년, 페인은 정말로 하버드 천문대의 문턱을 밟았다. 페인이 쓰게 될 책상은 캐넌의 것이 아니라 리비트였다는 것만 빼면, 페인이 내뱉은 말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섀플리는 하버드 천문대에 대학원 프로그램을 열어 석박사 연구자를 배출하려 했는데, 여학생 후원 자금을 받은 덕에 여학생이 입학 대상이 되었다. 페인은 하버드 천문대 대학원에 두 번째로 들어온 학생이었다. 페인은 다른 하버드 컴퓨터들과는 다르게 대학원생으로서 하버드 생활을 시작했다.
섀플리는 세상을 떠난 헨리에타 리비트가 했었던 일을 페인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페인은 ‘자기만의 연구’를 원했다. 그녀는 별의 스펙트럼에 원자 구조와 양자 물리학을 접목시키고 싶었다. 우려와는 달리 섀플리는 흔쾌히 페인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하버드가 그동안 쌓아둔 사진 건판을 연구에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후에도 섀플리는 석사학위에 만족하지 말고, 연구를 계속해서 박사학위를 따라며 페인에게 재촉 섞인 응원을 건넸다. 그에 화답하듯 페인 역시 천문대의 유령이란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밤늦도록 연구에 매진했다. 애니 점프 캐넌과 안토니아 모리는 엄마처럼 곁에서 페인을 챙겨주었고, 섀플리는 논문을 대신 타이핑해주기까지 했다. 하버드 천문대의 모두가 페인을 아꼈다.
페인은 별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별의 구성 성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구와 비슷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페인의 연구 결과는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녀의 결과에 따르면, 별의 주성분은 수소와 헬륨이었다. 지구를 이루는 성분들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매우 적었다. 페인은 이 결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이 분야의 일인자이자 논문 심사위원인 헨리 노리스 러셀은 논문을 읽고는 불가능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학위는 받아야 했기에, 페인은 논문 마지막에 ‘항성에 존재하는 수소와 헬륨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데, 이는 확실히 비현실적인 수치로 보인다.’라고 적고, 논문을 제출하고 말았다(그러나 러셀은 페인의 박사학위 논문이 이제껏 읽은 것 중 최고라고 칭찬했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부정해야 했지만, 페인은 마침내 1925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천문대가 배출한 최초의 박사이자,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박사가 되었다고 인생이 순탄히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페인은 1927년부터 1938년까지 공식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섀플리의 비공식 조교와 턱없이 적은 연봉에 만족해야 했다. 섀플리는 페인이 교수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버드 대학 총장에게 수차례 건의했지만, 총장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쁜 일도 있었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러셀은 페인의 논문을 읽은 뒤에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도 결국엔 별에 수소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페인이 옳았던 것이다. 페인은 인류의 우주를 또 한 번 뒤집었고, 과학자들은 이제 ‘우주엔 왜 이렇게 수소가 많은가’란 새로운 숙제를 얻게 되었다.
이후 페인은 동료 천문학자와 결혼하여 페인-가포슈킨이란 성을 얻었고,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섀플리의 노력 덕에 1938년엔 필립스 천문학자라는 직함을 받았고, 섀플리의 뒤를 이은 천문대장 도널드 멘젤이 힘을 써 1956년엔 정교수가 되었으며, 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변광성 연구를 이어갔고 학생들도 지도했는데, 그들 모두 천문학에 큰 기여를 했다. 육아와 연구, 그리고 최초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는 상당했을 텐데, 페인-가포슈킨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상당한 노력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페인-가포슈킨은 하버드 컴퓨터가 하나하나 쌓아 올린 돌을 밟고 마침내 금녀의 담을 넘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성들은 여전히 담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담을 넘고, 부수고, 결국엔 무너뜨릴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우리보다 앞서 담을 넘은 그녀를 떠올리며.
“명예나 돈 때문에 과학을 하지 마세요. 그건 더 쉽고 좋은 방법으로 얻을 수 있어요. 과학 말고는 원하는 게 없을 때, 그때 과학을 하세요. 과학으로 얻게 되는 건 아마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정상에 올랐을 때 장대한 지평선과 마주하는 기분 정도일 겁니다. 그러나 그걸 느끼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죠.
-천문학을 시작하려는 청년들에게, 페인-가포슈킨의 자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