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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Jun 29. 2023

6월, 감자, 초당옥수수, 그리고 비트

감자, 초당옥수수, 비트

중부지방의 도시 농부들은 6월이 되면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달력을 펼쳐 하지가 무슨 요일인지 확인하고, 장마가 언제쯤 시작되는지 알아보려 자주 일기예보를 확인하지요. 그들이 바쁜 이유는 텃밭에 심어둔 감자를 캐기 위함입니다. 장마가 오기 전, 하지 부근에 캐는 감자라 해서 하지 감자라 부르지요.


그러나 제주도 농부들에게 하지 감자는 생소한 단어입니다. 제주는 중부지방에서 쓰는 24 절기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따뜻하죠. 3월 말에 고양시 어드메에 있는 텃밭에 감자를 심고 그다음 주에 제주로 내려왔는데, 제주에선 이미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있더군요. 그러니 감자도 하지가 아닌 6월 초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제주에서 많이 심는 감자는 대지마라는 품종입니다. 제가 먹어본 바로 대지마는 수미보다 단단하고 쫀득한 편입니다. 포슬포슬한 맛은 없지만 조림을 할 때 감자가 덜 부스러지지요. 감자튀김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희 집은 이번에 감자를 심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웃 농부님이 가져다주신 감자 두 상자 덕분에 이번 달은 원 없이 감자를 먹을 수 있었지 뭡니까.


그뿐일까요? 한경면의 6월은 감자뿐만 아니라 초당옥수수의 철이기도 했습니다. 마늘 수매로 분주했던 농협 농산물 직판장은 초당옥수수를 선별하는 이들로 얼마간 북적거렸지요. 올해 제주엔 5월에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초당옥수수가 흉작이었답니다. 크기도 작고, 알이 맺히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요. 그런 옥수수는 농협에서 받아주지 않아요. 그럼 어떡하겠습니까. 하나당 500원이라도 받고 팔거나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이지요. 덕분에 일주일 간은 밥 대신 초당옥수수를 먹기도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감자도, 초당옥수수도 아닌 레드 비트를 수확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뽑아둔 비트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농담이 아니라 비트가 정말 아이 머리만 했거든요! 아무리 봄에 심은 비트가 겨울에 심은 비트보다 크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좀 지나 보니 알겠더군요. 제가 그동안 산 비트들은 하위 등급의 비트였던 것입니다. 10 킬로그램 박스에 30개 이상 들어가는 잘디 잔 비트들 말이에요. 뭐, 비닐하우스 안에 커서 위로 옆으로 잘 큰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비트의 줄기를 잡아 땅에서 뽑은 뒤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둡니다. 비트 언덕이 만들어졌다 싶으면 언덕 끝에 포대를 깔아 두고 의자 방석에 앉아 식칼을 듭니다. 식칼에 붉은 액체가 묻어있군요. 하지만 오해 마세요. 이건 비트의 뿌리와 줄기를 자른 흔적이니까요. 손으로 잔뿌리까지 제거한 비트를 포대에 모아둡니다. 전화를 받고 오거나 잠시 한눈을 팔면 비트를 자르던 칼은 없어지기 일쑤입니다. 칼을 이파리와 함께 던진 것도 아닌데 칼은 이파리 더미 속에 숨어있습니다. 칼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칼을 땅에 꽂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비트 밭에는 비트 이파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트 농부만이 뽑을 수 있는 엑스칼리버죠.


비트 손질을 마치면 아버지를 호출합니다(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많이 하실 수 없어요). 아버지는 박스에 농산물을 얌전히 담는 재주가 있거든요. 10킬로그램의 비트가 담긴 비트 박스를 트럭으로 모두 옮기면 그날의 수확은 종료됩니다. 이 비트 중 일부는 산지 직송으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농협 직판장으로 보내 가락시장을 비롯한 농산물 시장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가격이 측정되지요. 아쉽게도 올해는 비트 가격이 썩 좋지 못했어요. 비트를 재배한 농가가 많았나 봅니다. 그래도 비트를 받고 좋은 후기를 남겨주신 분들이 있어 기운이 났습니다. 생각보다 비트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찾으시는 분도 있으셨고요. 얼른 좋아지셨으면 하는 마음에 비트를 좀 더 많이 담기도 했어요(택배 기사님, 미안해요).


제주는 6월 말부터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비도 비지만 온 동네에 안개가 자욱하고 집안의 습도는 7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지요. 이제 곧 미니 단호박의 철이 다가오는데, 역시 흉작이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5월에 잔뜩 내린 비 때문이지요. 저희 단호박 밭에도 중간중간 자라지 않은 구역들이 있어요. 호박들이 이번 장마는 무사히 넘기길 바라봅니다. 장마가 가지 않을 것 같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한여름이 찾아올 겁니다. 지금은 조용하기만 한 이 동네도 단호박을 수확하러 온 인부들과 박스를 가득 실은 트럭들로 소란해질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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