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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Jan 07. 2024

12월, 못난이 귤 사세요

노지감귤

제주는 오래간만에 날씨가 좋습니다. 제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날에 해변 산책을 나가거나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좋은 날씨엔 대부분 흙 위에 서있었던 것 같습니다. 12월 한 달 동안은 귤을 따기 위해 귤 밭에 있었습니다(제주도 사람들은 노지 감귤을 기르는 과수원을 귤밭이라 불러요). 매일 아침마다 노란색 콘테나, 빨간색 귤 바구니, 귤 가위를 트럭에 싣고 귤 밭으로 출발합니다. 단단한 나뭇가지와 혹시 언제 나타날지 모를 동물들(?)에 대비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장갑과 팔 토시까지 끼면 귤 딸 준비 완료입니다. 아, 나뭇가지에 목이나 얼굴을 긁힐 수도 있으니 바라클라바 같은 털모자와 마스크도 쓰는 게 좋아요. 다이소에서 단돈 5천 원에 득템 했지요.


귤 따는 일은 다른 일에 비해서 아주 쉽습니다. 가위로 톡톡 가지를 잘라 귤 꼭지를 납작하게 만들면 되거든요.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지 않고 서서 일하기 때문에 일하고 나서도 근육통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제주도의 거센 바람도 귤 밭에선 잠잠해지지요! 그나마 힘든 점을 꼽으라면, 나뭇가지 사이를 오갈 때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부딪힐 수 있고, 나뭇가지 사이의 수많은 거미줄(운이 나쁘다면 커다랗고 화려한 거미까지)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겨울이라 벌레는 많이 없어요. 초여름엔 뱀도 봤는데 겨울잠을 자러 간 모양입니다.


우리 집 귤 밭은 제가 태어나고 몇 년 뒤에 외할아버지가 산 거라고 들었습니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서울 사람이 뭐 때문에 귤 밭을 사셨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귤 사 먹는 제주도민이 될 기회는 면하게 되었지요.  부모님은 다른 농사를 짓느라 바빴고, 집과도 가까운 편이 아니라 귤 밭은 자연스럽게 방치되었어요. 겨울이 찾아오면 그제야 귤나무들을 떠올리고는 부랴부랴 귤 밭을 찾았지요. 나무에 달려있는 귤은 제가 알던 그 귤이 아니었어요. 우리 집 귤은 매끈하고 빛나는 마트 귤들과는 달리, 크고 거칠고 못생겼지요. 별로 먹고 싶게 생기지 않았지만, 열심히 자라주었으니 하나 먹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달기만 하거나 물 탄 듯 싱거운 맛이 아니라, 새콤달콤한 맛이 응축된 진짜 귤이었습니다.



그 맛을 알게 된 뒤로 겨울이 오면 아빠, 엄마, 동생과 함께 귤을 땄습니다. 처음에는 친척들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겉모습에 놀란 친척들이 맛에 한 번 더 놀라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보내겠다며 돈을 주고 사기 시작했어요. 초반엔 '귤이 왜 이렇게 생긴 거예요?'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는데, 다행히 먹어보고 환불을 요청하는 사람은 없었어요(이번에 30년 만에 최초 환불자가 발생했지만요). 엄마는 뚱뚱하고 못생긴 우리 집 귤을 설명하기 위해 '뚱허니네'라는 상호를 만들었지요. 뚱허니패밀리란 유치한 이름은 바로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어렸을 땐 귤 밭 주변에 식당이 많지 않아서 항상 가스버너와 컵라면을 챙겼어요. 센 바람에 가스불이 자꾸만 꺼져서 가스버너 주변에 박스를 세운 뒤 물을 끓여야 했죠. 저는 귤나무 잎에 붙은 매미 허물을 정말 싫어했어요. 정신없이 귤을 따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눈앞에 매미 허물이 있었을 때의 기분이란... 하지만 뒤집은 콘테나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건 정말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이제보니 라면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노동이 소풍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죠. 전 튀김 우동을 자주 먹었던 것 같네요! 이젠 귀찮고 힘들기도 하고, 귤밭 주변에 식당들이 많아져서 최근엔 항상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그러다 한 번은 서둘러 작업하고 돌아가려고 귤밭에서 컵라면을 먹게 되었는데,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귤밭에서 엄마표 김밥으로 배를 채웠던 작년 여름도 생각나고요. 그때는 아빠도 함께 있었는데 말이죠.



밥을 먹고 나면 일하기가 싫지만, 해가 금방 지기 때문에 서둘러 귤을 땁니다. 귤밭은 또 금방 어두워지거든요. 귤나무는 해걸이라고 해서, 한 해는 열매가 적게 열리고 한 해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현상을 겪어요. 올해는 우리 귤은 적게 열리는 해였기 때문에 귤 작업이 한 달 만에 끝나버렸답니다. 딸 때는 그렇게 징그럽더니 막상 다 따고 나니 아쉽더라고요. 뒤늦게 귤을 찾는 분들도 귤이 끝났다는 소식에 아쉬워하셨고요. 내년엔 더 많은 귤이 열릴 테니 노지 감귤 공부도 하고 풀도 자주 베고, 자주 보러 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귤밭 문을 닫습니다.


며칠 쉬고, 뚱허니패밀리는 다시 밭으로 나갑니다. 이제는 콜라비의 계절이거든요!




* 늦가을에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셔서 글 발행이 늦어졌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은 없겠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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