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0일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일어났습니다. 아니, 사실 눈은 4시부터 떠졌어요. 단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났을 뿐이죠. 저는 배가 고프면 꼭 잠에서 깬답니다. 배가 고파도 피곤하면 잠부터 자는 유형도 있지만, 저는 배가 고프면 눈이 절로 떠지는 유형의 사람이에요. 오늘도 체중계에 올라가 봤는데, 그럼 그렇지 그저께랑 몸무게가 똑같네요. 어제 제가 잠에서 덜 깨서 숫자를 잘못 봤나 봐요. 아니면 체중계도 더위를 먹었던지요.
새벽 6시부터 엄마가 어제 사둔 감자빵과 두유를 먹습니다. 이래서 노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체중이 늘어요. 트럭을 타고 과수원으로 이동해 씩씩하게 작업 장소로 걸어갔는데, 어째 모시풀들이 어제보다 더 키가 커진 것 같네요. 줄기도 더 단단해진 것 같고요! 베고 또 베도 모시풀 군단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눈앞에 놓인 것부터 차근차근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큰 길이 만들어져 있죠. 또다시 무성한 모시풀 숲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빛이 새어드는 곳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아까 만든 큰길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빛을 향해 나아가면 돼요.
한창 모시풀을 베고 있는데 하얀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입니다. 모시풀은 앞면은 초록색이지만 뒷면은 옅은 회색에 가깝거든요. 이파리가 바람에 날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이파리가 아니었습니다. 제 손바닥보다 작은 길이의 작은 도마뱀이었죠. 도마뱀은 제 칼날과 쓰러지는 풀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생명체와의 만남이 썩 반갑진 않지만 그렇다고 생명체에 해를 가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아아악! 도망쳐!!!‘라고 소리치며 도마뱀이 도망갈 시간을 주었습니다(그러는 와중에 칼날은 여전히 돌아가고). 매미들이 다 같이 음정을 올리고 칼날은 돌아가며 모시풀들을 쓰러뜨리는 사이에 도마뱀은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무사히 어디론가 갔을까요. 이 잡초들의 숨을 끊고 있는 사람이 도마뱀의 걱정을 하다니 우습네요. 그런데 잘 돌아가고 있던 예초기가 갑자기 윙 소리를 내더니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손가락에 힘이 풀렸나 싶어 다시 스위치를 꾹 눌러봤지만 예초기는 몇 초 돌아가다가 멈춰버렸습니다. 여러 번 스위치를 눌러보다가 배터리 접촉 불량인가 싶어 몇 번 배터리를 뺐다가 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예초기가 과열된 걸지도 모르니 이참에 조금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에 유튜브로 저와 같은 예초기를 쓰는 사람들이 올린 영상을 살펴봤어요. 마침 저랑 비슷한 문제를 겪은 한 분이 예초기의 칼날이 돌아가는 부분을 해체해 보면 풀들이 엉켜있을 거라는 영상을 올린 게 아니겠어요? 육각 소켓을 집어 예초기에 고정된 볼트를 풀어보려는데 아무리 힘을 주고 돌려도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내가 볼트를 이렇게 단단하게 잠갔다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제 몸은 땀으로 모두 젖은 상태입니다. 속눈썹에도 땀이 고여 눈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죠. 햇볕은 제 등짝에 강렬한 스매싱을 연신 날리고 있고요. 그 와중에 모기가 귀 옆에서 왱왱거리며 날아다니고 바닥에 쌓인 잡초 더미에선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예초 작업은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데 예초기는 돌아가지 않고 엄마는 저보다 더 땀을 흘리며 허리를 굽혀 낫질을 하고 계시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성인이라도 짜증이 안 날 수 없지 않을까요?(제발 제가 성격 파탄자가 아니라고 해주세요)
예전 같았으면 예초기 핑계를 대며 집에 가자고 했겠지만, 저도 철이 좀 들었나 봅니다. 더 이상 미래의 저에게 일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초기를 챙겨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공업사를 찾았습니다. 드릴로 육각 볼트를 푸니까 금방 풀리더라고요(앞으론 드릴도 챙겨가야겠네요). 예초기 헤드를 풀어보니 그 안엔 풀만 많이 꼬여있는 게 아니라 부품들도 손상을 입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어요. 이래서 예초기가 자꾸 멈춘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제주에선 로켓 배송도 이틀이 걸린다고요! 조금이라도 더 해봐야죠. 공업사 사장님께 비타민 음료 한 병을 안겨드리고, 엄마와 저도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다시 2차전을 준비했습니다. 엉킨 풀을 빼낸 덕분에 얼마간은 예초기가 잘 돌아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얼추 풀베기를 마쳤답니다. 야호!
전문가가 와서 제가 일한 꼴을 본다면 이게 풀을 벤 거냐고 혀를 끌끌 찼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해냈다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 어떻게 풀을 베던 지 풀은 또 자라고, 가을에 또 풀을 베러 과수원에 와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 더 잘했어야 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보다 망가진 예초기 부품을 구매하고 다음 예초를 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초기 전문가들의 영상을 보다 보니 칼날과 줄날을 동시에 장착해서 쓰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이런 신세계가 또 있었다니! 가을 예초 때 한 번 써먹어봐야겠어요.
입추가 지나서인지, 오후에 소나기가 내려서인지 밤이 되니 살짝 서늘해진 느낌이 들어요. 풀을 베듯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며 다음 계절을 향하듯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뭐라도 되겠죠. 이 글도, 저와 엄마의 엉망진창 야매 농사도, 제 삶도. 그러니까 우리 모두, 조금씩 조금씩 빛을 향해 나아갑시다.
일단 휴가부터 다녀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