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지방의 도시 농부들은 6월이 되면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달력을 펼쳐 하지(대략 양력 6월 21-22일)가 무슨 요일인지 확인하고, 장마가 언제쯤 시작되는지 알아보려 자주 일기예보를 확인하죠. 그들이 바쁜 이유는 텃밭에 심어둔 감자를 캐기 위함입니다. 하지 부근에 캐는 감자라 해서 하지 감자라 부른대요. 그러나 제주도 농부들에게 하지 감자는 생소한 단어일 겁니다. 제주에선 중부지방에서 쓰이는 24 절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제주는 그보다 훨씬 따뜻하니까 중부지방보다 한 두 달 앞서 움직이죠. 3월 말에 고양시 어드메에 있는 공유 텃밭에 감자를 심고 그다음 주에 제주로 내려왔는데, 제주에선 이미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있더군요. 그러니 감자도 하지보다 일찍 수확합니다.
제주에서 많이 심는 감자는 대지마라는 품종입니다. 제가 먹어보니 대지마는 육지에서 많이 재배하는 수미 감자보다 단단하고 쫀득했어요. 포슬포슬한 맛은 없지만 덜 부스러져서 감자튀김이나 조림, 카레나 국에 넣기도 좋아요. 사실 저희 집은 이번에 감자를 심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웃 농부님이 감자를 두 상자나 주셔서 이번 달은 원 없이 감자를 먹을 수 있었지 뭡니까. 거기다 한경면의 6월은 감자뿐만 아니라 초당옥수수의 철이기도 합니다. 마늘 수매로 분주했던 농협 농산물 직판장은 초당옥수수를 선별하는 이들로 북적였어요. 올해 제주는 5월에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서 초당옥수수가 흉작이었답니다. 크기도 작고, 알이 맺히지 않은 것도 많았대요. 그런 옥수수는 농협에서 받아주지 않아요. 그럼 어떡하겠습니까. 하나당 500원이라도 받고 팔거나 이웃에게 나눠주는 거죠. 그런 친절한 이웃 덕분에 일주일 간은 밥 대신 초당옥수수를 먹기도 했습니다.
이번 6월, 우리 가족은 감자도, 초당옥수수도 아닌 레드 비트를 수확했습니다. 아빠가 시험 삼아 뽑아둔 비트를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농담이 아니라 비트가 정말 아이 머리만 했거든요! (그보다 컸는지도…) 알고 보니 제가 그동안 마트에서 본 비트들은 하위 등급의 비트였던 것입니다. 10kg 박스에 30개 이상 들어가는 잘디 잔 비트들이었던 거죠. 그래도 아까 그 비트는 심했어요. 간간히 호박만 한 비트가 나올 때마다 저울에 올려놓고 인증샷을 찍었답니다. 우리가 길렀지만 좀 징그럽네요.
본격적으로 비트를 수확해 봅시다. 먼저 비트 줄기를 잡아 땅에서 뽑고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둡니다. 비트 언덕이 만들어지면 언덕 끝에 포대를 깔아 두고 의자 방석에 앉아 식칼을 들어요. 오, 식칼에 붉은 액체가 묻어있군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비트의 뿌리와 줄기에서 나온 즙이니까요! 줄기와 뿌리를 자르고 손으로 잔뿌리를 제거한 비트를 포대에 모아둡니다. 전화를 받고 오거나 잠시 한눈을 팔면 비트를 자르던 칼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칼을 이파리와 함께 던진 것도 아닌데 이파리 더미 속에서 칼이 발견되더라고요. 칼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칼을 땅에 꽂아둬야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비트 밭에선 비트 이파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트 농부만이 뽑을 수 있는 엑스칼리버죠.
비트 손질을 마치면 아빠를 호출합니다(아빠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제 일을 많이 할 수 없어요). 아빠는 박스에 농산물을 예쁘게 담는 능력이 있답니다. 박스 무게까지 합쳐 약 11kg의 비트 박스들을 트럭으로 모두 옮기면 그날의 수확은 종료됩니다. 이 비트 중 일부는 구매자에게 바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농협 직판장으로 보내 가락시장을 비롯한 농산물 시장으로 가게 돼요. 그곳에서 가격이 측정되죠. 아쉽게도 올해 비트 가격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비트를 재배한 농가가 많았나 봐요. 그래도 비트를 받고 좋은 후기를 남겨주신 분들이 있어 기운이 났습니다. 생각보다 비트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직접 비트를 사러 비닐하우스로 찾아온 중국인 여자분도 기억에 남아요. 자가 치유 중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을까요.
제주는 6월 말부터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온 동네에 안개가 자욱하고 집안의 습도가 7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어요. 이제 곧 미니 단호박의 철이 다가오는데, 역시 흉작일 거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역시나 5월에 잔뜩 내린 비 때문이겠죠. 우리 단호박 밭에도 중간중간 호박이 자라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 호박들이 이번 장마는 무사히 넘기기를 바라봅니다. 장마가 가지 않을 것 같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한여름이 찾아올 거예요. 지금은 조용하기만 한 이 동네도 단호박을 수확하러 온 인부들과 박스를 가득 실은 트럭들로 소란해질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