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꿈을 꾸었다.
도서관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이었다. 뒷자리에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무척 흥분하여 시끄러웠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 사나운 상태로 운전하다가 사람을 치고 말았다. 차 앞바퀴 밑으로 물컹한 느낌이 들었다. 밑에 깔린 사람이 분명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그때는 그냥 악몽이려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엔 차 두 대를 운전하고 있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상황이었다. 앞선 차는 나 혼자 타고 있었고, 뒤에 있는 차는 아이 둘을 태우고 있었다. 앞차를 조금 운전하다 스르르 굴러가게 놓아두고, 뒤로 옮겨 타서 아이들 차도 스르르 움직일 정도로만 액셀을 밟고, 그렇게 두 대를 한 번에 몰며 도서관에 도착하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나니 전날의 꿈까지 이해되었다. 아이들과 밀착되어 있는 삶에 불만을 느끼고 있구나. 동시에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구나. 나는, 아이들과 따로 또 같이 가는 것을 원하는구나.
아이들이 커서 기관에 보낸 후 자유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난처한 상황에 꼭 끼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주변의 적절한 도움, 특히 남편의 도움 없이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좀 컸다는 이유로 학원에 돌리거나 홀로 놔둔다면, 아이의 정서적인 부분이 충족되지 않으리라는 염려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일을 벌이지 않고는 있지만, 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여전히 힘들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지만 귀찮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에게 실망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바닥을 본다. 인간의 성품이 절대 선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나의 삶에 아이들이 포함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우주인 것을. 앞으로 두고두고 쓰게 될, 자신과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들어주는 존재인 것을.
같이 이 삶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들이 먼저 떠날 때까지 내 곁을 내주어야 한다. 나는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 애쓴다. 지난 주의 일이었다. 중요한 모임에 가야 했는데 남편은 아이들을 봐줄 수 없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싶었다. 만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아이들을 데려갔다. 모임 전에 미리 밖에서 실컷 뛰어놀게 하면서. 모임 시간에 놀 만한 아이클레이와 색종이와 사인펜이 든 가방을 메게 하면서. 적극적으로 충분히 놀아주어서 엄마를 더 이상 안 찾기를 바라면서.
어디까지가 내 자리를 찾는 것인지, 어느 만큼을 내주어야 할지. 늘 고민하다가 문득 멈추는 곳이 바로 '따로 또 같이' 가는 곳의 경계이기를. 그렇게 가다 보면, 꿈에서처럼 어딘가에 천천히 도착하더라도 마침내 도착은 할 수 있기를. 각자의 원하는 바를 충족하면서도 서로 양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함께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