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겨움 Jan 13. 2023

순간의 진실함

영원, 그런 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시작은 iCloud의 용량이 부족했던 것부터다. 오래된 외장 하드를 꺼내서 사진을 옮겨야지 생각했고, 그렇게 딸깍딸깍 폴더를 열어보다가 4년 전, 그 이전의 사진들을 입 벌리고 보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시간의 단편들이 찾아와서, 아 맞아! 이랬던 순간이 있었지. 추억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 사진을 보다 보니 전 남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혼자 떠났던 여행길에 두 번이나 자비를 털어서 와 줬던 고마운 사람. 그러나 그로 인해서 내 여행의 중요한 순간들은 그와 함께 한 사진들로 꽉꽉 채워졌다. 둘이 찍은 사진들만 골라서 지워야 하는데 많아도 너무 많다는 생각에 1차 당황.


그리고 또 당황스러웠던 것은 영상 속 전 애인에게 했던 말투를  지금의 애인에게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놀라 자빠질 뻔.  이건 마치 30년 넘게 난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내 옆에 둔 사람들만 숑숑~ 체인지된 그런 소름 돋는 느낌이었다. “~해유”라는 어설픈 충청도 사투리와 “~했어요?”라는 존칭어 사용까지. 지금의 애인이 이제는 나를 닮아서 새롭게 구사하고 있는 언어를 나는 3년 전에도 그대로 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상대를 내 언어로 물들여놓고선 헤어지자고 했었구나.


신경질 나게 당황스러웠던 것도 있다. 무슨 뽀뽀를 못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전 남자친구와의 뽀뽀 사진이 너무 많았다. 영상 속에서도 얼마나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던지, 전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우리가 좋았던 순간도 기억해 줘”라고 말했던 편지글이 문득 생각났다. 잊고 지냈었는데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나 예뻐했던 시절이 있었구나. 그때의 나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이 감정들도 훗날 그렇게 읊조리게 될 일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쪼그라진 기분 때문에 저녁 내내 영상만 봤다. 잠들기 전에 든 생각. ‘왜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거지? 그때의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아서? 사랑이 영원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영원한 것만 의미가 있는 건가?’ 그 후로 그 둘은 행복하게 영원히 살았습니다,라는 문장은 동화 속에만 등장하는 문구가 아니던가? 관계가 끝까지 지속되지 않았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왜 나는 또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생각을 한 걸까?


옛날 사진은 차근히 지우면 되는 것이고, 나중에 또 지우게 될 사진이라도 오늘 찍고 싶다면 찍으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답이겠지. 대책 없이 순간에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두고 싶은 풍경이니까.



폴더에서 사람을 인식한 다음에  사람이 나온 사진을 모두  번에 ~ 삭제해 주는 ‘헤어진 연인 삭제 기능 필요합니다!!! 누가 개발 

매거진의 이전글 사과받지 못하는 내 상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