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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Jul 07. 2020

퇴근 후의 행복 일기

자잘한 행복 지점을 곳곳에 둔다.

5시 25분, 정확하게 오 분이 지나면 퇴근을 할 수 있다. 오늘은 아무 약속도 없는 날이다. 무조건 칼퇴해야 한다. 팀장님의 눈치가 보여서 예의 상 10분 더 앉아 있다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하고 나왔다. 사원증을 기계에 띡~ 찍으면서 퇴근하는 순간, 이제부터 시간의 주인은 나다.


주말에 친구들이 놀러 와서 해줄까 하고 냉동 오징어를 하나 녹여놨는데, 먹지 않는 바람에 처치 곤란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오징어 볶음을 해보려고 네이버에 검색하니 역시나 백 선생님이 나를 요리의 세계로 안내해 주신다. 블로그에서 말해주는 대로 따라서 만들었더니, 이게 웬걸! 처음 해 본 오징어 볶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맛의 요리가 나왔다. 청양고추까지 넣어 칼칼하게 만들어진 훌륭한 맛의 오징어 볶음에 갓 지은 따스한 밥을 올린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반숙 계란 프라이까지!


방 창가에 앉아 시원한 물 한잔과 함께 오징어 덮밥을 먹었다. 장마를 앞둔 터라 밖은 어둑어둑하다. 해가 저 멀리서 지는 듯한데 일몰 직전의 보드라운 모닥불 색깔의 빛이 아파트 벽면을 가만히 타고 간다. 찰나의 순간의 빛이 아름다워 덮밥을 오물대고 먹으면서 한참을 그 빛을 바라봤다. 행복하다.


먹고 나선 바로 싱크대에 갖다 놓고 물로 그릇을 채운다. 조금 후에 설거지를 할 때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후, 냉장고 문을 열어 요거트 2l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앞 집 이웃이자 회사 동료인 채림이가 만들어 준 블루베리청을 요거트 위에 얹었다. 요 근래 나의 베스트 힐링 음식 중 하나인 ‘블루베리 요거트’를 먹기 위함이다. 밥그릇 하나에 요거트를 꾹꾹 눌러 담아 커다란 밥숟가락으로 한 입. 역시나 최고의 맛이다. 너무 맛있으면 혼자인 것도 잊은 채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되고, 궁둥이가 들썩거린다. 신이 난다. 아쉬움이 남아 결국 한 그릇 더 먹었다.


난 설거지나 빨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저분했던 것들이 깨끗이 씻겨져 나가는 걸 보는 게 좋다. 마음까지 깔끔해지는 기분이랄까~ 기분 좋게 설거지를 하고, 애장품 아이패드를 켰다. 넷플릭스로 무슨 영화를 볼까나~ 오늘의 픽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하울이 중간에 회색 새로 막 변신하고 여자 주인공은 할머니가 되었다가 다시 젊어졌다 하는 데 통 정신이 없다. 흠, 왜 유명한 지 잘 모르겠다. OST 음악만 내 스타일이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책이 읽고 싶어 진다. 요새 읽고 있는 책은 ‘김이슬 사담’ 그리고 ‘태도의 말들’ 두 권이다. 그중 ‘태도의 말들’ 책을 집어서 열 쪽 넘게 읽었다. 중간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는 구절이 있었는데, 정말 그러하다. 징징대는 놈들에겐 엄청난 힘이 있다.


매력을 느끼는 건 쿨한 놈들이지만 사실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이 징징대는 놈들 인 것이다. - 소설가 은희경



그리고, 이 글을 쓰도록 방아쇠를 담긴 문구도 있다.


행복감이란 얼마나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느끼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 도시건축가 김진애



요새 뮤지컬 동호회에서 스터디 형태로 하는 ‘극작가/연출 스터디 모임’에 참여한다. 지난 번에 각자의 인생 화두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나는 ‘주변과의 관계’라고 답했고, 다른 친구들은 ‘행복’, ‘자기 계발’이라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으니 인생의 화두가 ‘행복’이었던 셈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점은 행복이란 그렇게 목표점으로 도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항상 행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을 일상 속에 많이 심어 두고, 자주 느끼는 것이 좋다. 그게 건강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일몰을 가만히 바라볼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집에서 혼자 책을 볼 때,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될 때, 누군가의 어깨를 토닥여줄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올 때, 새로운 여행지에 배낭을 하나 메고 찾아갈 때,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서 준비할 때, 잠자기 전 이불속으로 몸을 파묻힐 때, 세탁한 이불에서 퐁퐁~ 향기로운 냄새가 날 때, 주말에 아무런 약속도 없어서 늦잠을 늘어지게 잘 수 있을 때, 비를 쫄딱 맞을 때, 비 온 뒤의 맑은 공기를 깊게 마실 때, 난 행복을 느낀다.


오늘 저녁 난 - 칼퇴를 할 때, 오징어 볶음밥을 해 먹을 때, 블루베리 요거트를 또 먹을 때, 설거지를 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자기 전에 지금처럼 글을 하나 쓰면서 - 행복을 느끼고 느끼고 느꼈다. 거대한 행복보다는 자잘한 행복들을 하루 곳곳에 심어둔 이 저녁이 좋다. 잔잔하고 고요했던 나의 시간.


마음을 더 든든하게 채우면서 살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어.”보다는 “행복해지는 음식 먹으러 가야지.”라고 말하며 지내고 싶다.


오늘 저녁은 자랑할 만큼 유난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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