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2
집에서 약 4km 떨어진 강동 국민학교 입학 후, (학교가 4km 거리에 있었다니.....걸어다녔을까?)
줄곧 반에서 일등을 했다. (공부는 잘하셨나 보다)
여러 가지 행사에서 상장도 많이 받았다. 콩쿨대회, 웅변대회
(노래 잘하셨다고 들은 적은 있었는데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으시다니.... 놀라웠다)
4학년 때의 일이다. 큰누나가 외동면 우박에 살고 매형은 임실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
매형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셔서 유행가를 수첩에 적어서 부르곤 했다.
경향신문 주최로 콩쿨대회가 있다는 매형의 부름에 난 단숨에 달려갔다.
나이가 어려 성인팀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동부로 출전했다.
목소리가 잘 나오게 하려면 밥을 먹지 않고 배를 먹어야 좋다고 하여 배만 먹고 임실 국민학교로 갔다.
내가 부른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전체 성인 포함해서 1등이었다.
매형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시 임실 국민학교 여선생님 한 분이 엄청 이뻐해 주고 어쩔 줄 몰라했다.
대회를 마치고 학교에 오니 교장선생님이하,전 선생님, 교내뉴스거리가 되고 소문이 온 동네에 퍼져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노래 잘하는 인걸이 동생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가 보였다. 기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씨익 웃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였던 아버지는 이때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노래방에서 아버지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는것 같다. 노래를 부르며 아버진 어린날의 그 때를 떠올렸을까? 이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왜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그저 어른들이 다 좋아하는 옛날 노래라 생각했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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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짜증 내고 해가 나면 해가 난다고 화를 냈다.
가볍게 '왜 저러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에도 육두문자를 날리며 저주를 퍼부었다.
아버지의 그런 점이 싫었다.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가 싫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방법을 찾아 해결하려는 긍정회로가 내 뇌에서 크게 발달한 건
분명 아버지에 대한 반감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버스운전을 하셨었다. 그러다 덤프트럭을 사서 작은 회사를 차렸다.
오래되지 않아 IMF를 맞았고 부도가 났다.
압류통지서가 날아왔고 온 집안에 있는 물건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며 큰소리쳤지만 삼일 뒤에 집안의 모든 물건은 사라졌다.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나름 고가의 전축, 그리고 내 컴퓨터까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가전제품이 사라진 집 안은 휑하고 처참했다.
큰소리쳤지만 결국 압류를 막지 못한 아버지는 그날 술에 취해 들어오셨는데 웅얼거리며 미안하다 하셨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이 되어 직장 생활하며 번 돈으로 빚을 막기 시작했다.
많지도 않은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면 엄마가 카드로 돈을 빼서 여기저기 돌려가며 빚을 막았다.
다음날 통장을 확인해 보면 잔액 0원.
그런데도 은행 여기저기에서 연체되었다며 전화를 걸어왔고
회의 중, 식사 중에도 독촉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호기심 많고 하고 싶던 것도 많았던 20대, 어쩌다 가장이 되었고.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야만했다.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고 살기 싫었지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땐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다. 정말이었다. 그땐 그랬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하게 된 건.
말하면 싸우거나 등을 돌리게 되니 아예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