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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Aug 09. 2021

복숭아가 있으니 괜찮아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더위가 사라지게 될까, 애타게 기다려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다. 참아내고 버티고 피하다가, 지쳐가는 우리에게 여름이 미안해서 주는 선물은 복숭아인 것 같다. 수박 참외의 시원하고 청량한 맛은 내게서 화려하고 꽉 찬 복숭아를 제칠 수가 없다. 복숭아는 땡볕의 무더위에 더 진하게 익는 과일이니 고통을 감수해야한다.     


내게 복숭아는 돈 주고 사먹는 과일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부모님이 과수원을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우리집은 복숭아밭의 초록 숲에 가려 옥상 난간만 겨우 보였다. 온 가족이 매달려 복숭아를 따고 선별하여 상자에 담아 트럭에 실어내는 고된 계절이었다. 선선할 때 따야 복숭아가 안 물러진다고 새벽에 엄마가 사남매를 깨웠는데,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게 나는 너무 힘들었다. 끝까지 안 일어나려고 홑이불을 말아 덮고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은 엄마에게 등짝을 맞고 투덜거리며 일어나 밭으로 가야했다.  


   

더위와 노동에 지쳐도 나는 복숭아가 무척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는 백도, 기도, 천중도 같은 복더위에 나오는 복숭아였다. 이들은 속살이 하얀 백도 종류인데 더위가 절정에 이를 때 따는 복숭아답게 농익은 과육을 손톱 끝으로 벗겨내면 얇은 껍질이 훌훌 벗겨진다. 미끌미끌한 복숭아를 한입 가득 베어 먹으려면 진득하고 달콤한 꿀 같은 게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오래된 고목 아래 무릎까지 올라온 풀 섶에서 시큼하고 달큰한 향기가 난다. 우거진 수풀 때문에 찾지 못한 복숭아가 며칠 동안 과수원 바닥에서 상자 채 발효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윽한 술내를 풍기는 복숭아는 껍질이 물크러져 단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복숭아를 먹으며 괴롭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왜인지 너무나 달콤한 쾌감에 미간이 저절로 모아졌다.  

       

어릴 적 우리 아이들은 외갓집에 가면 복숭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비싸게 산 복숭아를 칼로 저며서 포크로 찍어먹는 것과는 다르게 원 없이 먹었다. 외갓집에서나 먹을 수 있는 흠집이 난 복숭아를 양푼 한가득 담아놓고 우리 엄마가 칼도 대지 않고 손톱 끝으로 껍질을 벗겨줄 때 두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지켜봤다. 그리곤 첫째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난 깡통 째 먹을 거야.”

“나도, 나도, 엉아처럼”

깡통 째라는 건 통째로 들고 입으로 베어 먹겠다는 거였다. 5살 형을 따라 겨우 3살인 작은 아들은 손가락을 있는 힘껏 벌려 자꾸만 미끄러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복숭아를 통통한 배로 받쳐가며 먹었다. 아이들이 앉은 자리는 어느새 단물이 흥건해졌다. 그러면 엄마는 단물 범벅이 된 아이들을 수도가로 데리고 나가셨다. 빨간 다라이 안에서 신난 복숭아동자들이 수도꼭지를 쥐었다가 마구 놓았다. 튀어나온 물줄기가 마당가의 채송화를 적셨다.  

  

마트에서는 찐득한 맛이 나는 복숭아를 살 수가 없다. 조금만 손자국이 나도 흠집이 나고 물러져 상품이 되지 못하니까 농가에서는 무르지 않은 딱딱한 복숭아를 출하한다. 조치원의 복숭아밭에서 여름마다 진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신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온다. ‘이번 주에 마도카 딸 거예요. 와서 일손도 돕고 복숭아도 먹고 가요.’ 마도카는 백도류의 복숭아인데 찐득한 물이 엄청나게 가득한 품종이다.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가에는 복숭아 노점이 줄지어 있다. 복숭아라고 써놓은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위협적인 땡볕 아래에서 바람 없이 축 늘어져 있다.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의 풀과 나무들도 무시무시한 태양빛에 축 늘어져있다. 뜨겁고 치열하게 여름의 열기를 빨아들인 식물들이 좁은 길을 위태롭게 지나는 차를 따다다닥 뜨드드득 하고 때렸다.    


과수원 앞마당은 새벽에 따다놓은 복숭아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주인은 콧잔등에 솟은 굵은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이 포장 작업을 하며 내게 복숭아를 먹으라고 권한다. 파치를 담아놓은 상자에서 절반이 물러버린 과육을 도려내고 단물덩어리인 복숭아를 먹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게 달콤한 맛에 저절로 미간이 모아진다. 농익은 과육을 씹을 것도 없이 후르릅 빨아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님들 앞에서 뭐하는 거지.’ 싶지만 이건 뜻대로 멈출 수가 없는 맛이다. 시누님이 내가 파치복숭아를 맛있게 먹는다고 칭찬하셨다. 양푼에 도려낸 무른 찌꺼기가 무덤처럼 쌓였다. 복숭아나무처럼 거친 주름이 잔잔한 신선생님의 시어머니께 농사짓느라 얼마나 힘드신지 여쭈었다. ‘힘들긴 머가 힘들어, 이게 다 돈이여.’ 하면서 깊게 패인 주름을 펴며 환히 웃으신다. 봄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 같다. 복숭아 따고 공판장에 실어내고 경매한 돈 들어오면 활짝 웃으시던 우리 엄마도 그랬다. 엄마는 나무마다 탐스런 복숭아가 분홍빛으로 익으면 좋아하셨다. 부모님은 복숭아를 기르고 복숭아가 우리들의 학비가 되었던 그때가 떠올라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든다.

실컷 먹고 일손을 도왔다. 바쁜 농가에 가면 손님이 따로 없다. 어머님집, 언니네집, 사돈집에 보낼 복숭아를 사고 우리 먹을 것도 사서 차에 복숭아를 싣는다. 집에 가서 양푼 한가득 말랑한 복숭아를 먹을 생각에 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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