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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Sep 05. 2022

매미나방은 어디 갔어요?



  나는 곤충에게 못할 짓을 참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동네 아이들이랑 놀 때 곤충을 괴롭히는 놀이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풍뎅이를 잡아서 거꾸로 뒤집어 흙바닥에 올려놓으면 몸을 못 뒤집는 풍뎅이가 겉 날개 밑에서 속 날개를 펼쳐 파르르 떨며 빙글빙글 돕니다. 그러면 아이들이랑 “풍뎅아, 풍뎅아, 마당쓸어라” 하면서 얄궂은 응원을 해댔습니다. 잠자리를 잡아 꼬리에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 날려 보냈고 사마귀를 잡아 사마귀가 난 손등을 물게 하거나, 기다란 강아지풀을 뽑아서 그 줄기에 메뚜기를 잡아 꿰어서 다녔습니다. 우리는 그 메뚜기를 구워서 숯검정을 묻혀가며 먹었으니 참 그악스럽게도 놀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곤충과 함께 장난질하며 놀았던 추억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은 어른이 되어서 알았습니다. 등산하는 중에 조그만 애벌레가 갑자기 눈앞에 뚝 떨어집니다. 어떤 종류의 애벌레는 포식자의 위협을 피하려고  몸속에서 거미줄 같은 실을 내어 나무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 같이 간 친구는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으악! 비명을 지르며 놀랍니다. 머 그럴 수 있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이번엔 발아래에서 날아오르는 벌레를 보고 으악! 비명을 지르며 놀랍니다. 그의 야단스런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놀랄 지경입니다.

    

  숲 반에 처음 오는 아이들도 대부분 곤충을 보면 기겁을 합니다. 6세반 아이가 꼬물거리고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 발로 밟아 죽이기도 합니다.     

 “개미는 널 해치지 않아. 잘 가라고 길을 비켜주자.”    

고 해도 또 그런 행동을 합니다. 내가 어릴 때 벌레를 가지고 엽기적으로 놀던 일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움직이는 생물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 있고, 곤충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다행이 숲에 자주 오게 되면서부터 아이들은 곤충을 관찰하고 신기해하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어느 여름날 아침. 단풍나무 줄기 밑에 매미나방이 앉아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비 그치고 물러나는 구름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퍽 시원해보입니다. 매미나방은 아직도 줄기 아래에 앉아있습니다. 비를 피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켜보니 산란관 끝으로 낳은 알을 단풍나무 줄기에 붙여 놓고 있습니다. 매미나방은 온몸에 촘촘히 나있는 털을 뽑아 알집이 비에 젖지 않게 이불처럼 덮어 주었습니다. 매미나방은 움직이지도, 먹지도 않고 꼼짝 없이 삼일 동안 알집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곤충은 알을 낳고 나면 대부분 생을 마감합니다. 생의 마지막 숙제는 후손을 남기는 것입니다. 알은 엄마나방이 덮어준 따스한 이불 속에서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에 깨어날 것입니다. 생을 이어가는 어미의 숭고한 숙명 앞에서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드는 까닭입니다.    

단풍나무 줄기에 알집을 만들고 있는 매미나방


숲 반 아이들이 조심스레 단풍나무 그늘에 모였습니다. 숨을 죽여 작은 소리로 이게 뭐에요? 하고 나를 쳐다봅니다. 혹시 알이 깨기라도 할까봐 소곤소곤 묻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숲에 다니더니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부드러워진 어린이들에게 나도 작은 소리로 말해줍니다.    

“매미나방 알집이야”
 “매미나방은 어디갔어요?”
 “알을 낳고 나면 엄마는 죽는단다. 그게 곤충의 운명이야.”

“불쌍해요.”    


곤충은 짧은 일생을 삽니다. 고작 삼일동안만 살 수 있는 하루살이부터 몇 주, 몇 달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짧게 살아서 오히려 오랫동안 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장하는 단계마다 몸의 형태를 달리하여 죽음의 위기를 넘깁니다. 알에서 태어나 애벌레가 되고 몇 번의 탈피를 거쳐 번데기 상태로 잠을 자고 난 후, 번데기를 뚫고 비로소 어른벌레가 되지만 얼마 후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합니다. 먹이도 없는 혹독한 추위가 위협하는 겨울철, 포식자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자연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봄에 깨어난 애벌레는 순식간에 나뭇잎 한 장을 먹어치울 것입니다.  싹이 트고 잎이 커지는 봄에 애벌레가 태어나면 살기 좋을 것이라는 것을 어미 나방은 알고 있었을까요. 매미나방 알집에서 이듬해 봄에 꼬물거리는 애벌레들이 알 껍질을 벗고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나는 매미나방의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이구, 징그럽게도 생겼네.”

“이런 것도 세상에 필요한 존재일까?”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곤충을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지 않습니다. 곤충을 알기 전 나도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온 몸의 털을 뽑아 따뜻한 이불을 덮어 준 매미나방 알집

    

우리는 태어날 때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지’ 라는 사명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그냥 온 것입니다. 그날 밤 부모님이 사랑을 나누었으므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삽니다. 우리는 때로는 기쁘고 즐겁게 때로는 무겁고 외롭게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곤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벌레 시기일 때는 나무를 해치는 해충이라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만 나비가 되어 꽃에 앉았을 때는 사랑받습니다. 식물은 곤충의 도움이 없이는 후손을 만들지 못합니다. 잎을 좀 줄 테니, 꽃가루를 옮겨달라고 나무가 곤충에게 부탁했을까요? 그들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지만 곤충들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위험하기만 한 자연 속에서 생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지구에 세든 세입자로서 식물과 곤충의 계약이 계속 성공적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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