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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Mar 13. 2020

Log#1 야간비행

고요함과 적막함의 향연

“In a flash, the very instant he had risen clear, the pilot found a peace that passed his understanding. Not a ripple tilted the plane but, like a ship that has crossed the bar, it moved across a tranquil anchorage. In an unknown and secret corner of the sky it floated, as in a harbor of the Happy Isles. Below him still the storm was fashioning another world, thridded with squalls and cloudbursts and lightnings, but turning to the stars a face of crystal snow.”


Antoine de Saint-Exupéry, Night Flight


고요함, 그리고 적막함.

웅웅 거리며 낮게 깔리는 기계음의 향연 속에서 막막한 침묵의 무게를 이기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떠 창밖을 쳐다본다. 검정이라는 단순한 색의 정의로는 막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하늘 안에서 곳곳에 박힌 별들이 땅으로 빛을 내려보내고 대지위의 불빛들은 이곳저곳에서 모여 마치 하늘의 데칼코마니처럼 존재하고 있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 사이로 달무리는 마치 해무처럼 바다 같아 보이는 하늘 위에 이불을 포개듯 구석구석 늘어뜨려져 있으며 조종실 내에서 계기들이 내뿜는 미약한 강도의 주황색 빛들은 창밖의 불빛들을 이기기엔 부족해 보인다. 눈길 닿는 곳 안에서는 마치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나 혼자인 것 같은 아득한 기분, 그 기분을 이겨내 보고자 끝없이 보이는 어둠 속으로 나의 시선을 천천히 옮겨 더 밝은 불빛을 응시해본다. 세상 모든 것이 잔잔해지는 순간, 그리고 실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게 느껴지는 지금 이 시간. 나는 지금 숨소리 조차 없이 고요히 잠든 대지로부터 32000 피트 위의 밤하늘 속을 순항 중이다.




30분 전, 나는 인천공항에서 이륙을 했고 얼마 전 바다와 맞닿은 강릉을 지났다. 조금 있으면 대구 컨트롤에서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보낼 것이다. "OZ 108, contact Tokyo control 133.8 good day" "contact Tokyo control 133.8, OZ 108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이 존재하고 있듯 하늘에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구분선으로 하늘 위에 공간이 나누어져 있고 그 공간을 우리는 공역이라 부른다. 각각의 공역은 관할 관제소가 항공기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통제하고 있다. 내 나라의 하늘과 작별하고 타국의 하늘로 진입하는 순간은 타지에서의 오랜 여행을 앞두고 집의 대문을 닫으며 나올 때 느끼는 그 아련한 기분과 비슷하다. 특히 지금처럼 세차게 내리쬐는 햇빛이 없어 땅의 시작과 끝이 애매모호한 야간비행은 더욱 그렇다. 종이지도 위의 등고선은 하늘 위에서 내려보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선에게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땅에서 솟아오른 골짜기의 높이는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높고 낮음을 판별할 수 있고, 그 비교할 대상은 어느 때엔 존재할 수도, 어느 때엔 단순히 존재하지 않아 높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기에 그저 내가 하늘 속에 있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시켜줄 뿐이다. 지금처럼 끝없이 펼쳐진 어두움 속에서 존재조차 불투명한 육지의 모습은 하늘과 별다를 바가 없어, 마치 심해를 헤엄치는 어두운 바닷속의 잠수함처럼 그저 앞으로 찬찬히 나아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만 들뿐이다.




처음 조종간을 잡은 후부터 야간비행은 존재하지 않는 노스탤지어를 손꼽아 기다리듯, 다가올 그날을 소소한 두근거림으로 기대하게 되는 일종의 버킷리스트 같은 존재였다. 그 고요함과 적막함 속에서 난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조종 실안의 공기의 무게는 낮과 얼마나 다를지, 별이 뿜어내는 저 빛은, 비행기를 적시는 달빛은 얼마나 잔잔할지 나는 궁금함을 가둘 수 없었다. 첫 야간비행의 날, 어두운 심연 속으로 고개를 높이 들어 달빛에 둘러싸인 구름을 뚫고 들어가는 그 순간, 내 호기심의 끝은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로 유유히 사라졌고 내 마음은 잔잔함과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머리 위로는 빛을 내리쬐는 별과 달, 발밑으로는 반짝거림을 멈추지 않는 불빛의 집합체 사이에서 몽롱함을 느끼며 바닷가의 경계선을 따라 비행하다 색색깔의 활주로로 발을 내디딘 그 기억. 마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조명이 매달린 사철나무 사이를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책을 다녀온 느낌. 땅에서의 괴리와 걱정들로부터 일순간 자유로운 마음으로 어두움을 순항하던 그 시간은 내게는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 들 일수 있는 지상에서의 시간이 아닌 그저 오롯이 스스로를 마주하는 하늘 속의 순간이었다.



야간비행의 고요함은 활주로에 비행기가 입을 맞추는 그 순간까지 계속된다. 나리타 공항에 접근하는 지금 이 순간, 난 하늘에서 땅으로의 조우를 바로 앞에 두고 있고, 이 적막함은 곧 땅 위의 소란스러움에 멀어지는 아득함으로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저 마냥 작아 보였던 불빛들은 비행기가 강하를 할수록 점점 커져 시야 속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커져만가고, 내가 다시 땅으로 조금씩,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켜주고 있다. "OZ 108, Cleared to land rwy 34R, wind 320/5". 관제타워에서 착륙허가를 듣고 조종간을 오른손을 뻗어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감싸고 왼손으로 추력 장치 위에 가볍게 얹어놓는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연못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듯, 활주로의 높이와 접지점을 잡기가 조금 막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50,40,30,20,10,5..." 비행기가 땅에서의 높이를 알려주는 Auto callout system은 내게는 땅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환영인사다. 비행기의 바퀴들이 엄마품을 파고드는 젖먹이 아이처럼 활주로에 안착하는 순간 오늘도 무사히 비행을 끝냈다는 본질적인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뒤이어 오늘 나와 함께 비행을 하며 야간의 꿈을 꾸고, 적막함 가운데 스스로의 과거 또는 미래와 마주했을 승객분들. 나와 함께 야간비행이라는 경험을 공유한 그들은 어떤 생각의 갈무리를 손에 쥐고 땅으로 내려왔을지 궁금한 생각도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위, 대략 1100킬로미터를 어둠 속에서 가로질러 땅의 품으로 복귀한 이번 비행도 모두의 축복과 기도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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