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좁아진 시야를 한순간에 찢어버리는, 놀라운 경험.
대학생 때 간 일본-히타카츠 혼자여행에 이은 두 번째 혼자여행. 사실 그때 이후로 대학원 입학을 위해 쉴 틈 없이 학교생활과 연구를 병행했고, 입학 이후로는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여유 없이 지내왔던 것이 결국은 스스로를 다시 지치게 만들었을 줄 몰랐다. 항상 자신을 일중독자라 자랑스럽게 말했던 과거의 나가 후회스러웠다.
"세상에 일중독자는 없다. 일과 자신의 균형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맞추거나, 혹은 그저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이 있을 뿐."
'아무리 바빠도 즐거우면 괜찮아'는 큰일 날 소리.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부족해지고, 그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 이런 사태를 피하려면 확실하게 '쉬는 것'이 그 비결이다.
- '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한다' 가바사와시온 지음, 오시연 옮김.
그래서 다시 스스로를 재충전하기 위해, 방콕으로 떠났다.
이전 히타카츠 여행도 그랬지만, 계획을 아주 상세히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열정적으로 계획했다. 누군가는 숙소와 비행기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여행을 즐긴다지만, 나는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짜증 내지 않기(특히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마음껏 여유 즐기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먹고 싶은 거 다 먹기.
하지만 예민한 성격 어디 가나. 공항버스 타는 순간부터 늦을까 봐 공항 도착할 때까지 내적 스트레스 폭발이었다. 여유 시간을 2배로 생각해서 출발해도 내가 생각하는 타이밍에 일이 진행이 안되면 곧바로 조급해지는 내 성격. 어쩜 이리 외부 충격에 예민한, 출렁거리는 사람일까. 이 기분의 진동수와 파고를 컨트롤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무사히 공항도착.
인생 처음으로 혼자서 공항 수속을 밟았다. 순식간에 내적 스트레스는 설렘으로 전환됐다. 역시 '인생 첫 경험'이라는 건 벗겨내기 무섭고 어려운 포장지로 포장된, 희귀한 선물이랄까.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이기고 리본 하나만 풀어내면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배움을 얻게 된다.(이번 여행 최종 스포)
'첫 경험'의 첫 번째 선물은 설렘. 나에게 적용된 이 아이템의 효과는 또 다른 경험의 시작으로 이어주는 개시제였다.
이 성분파악도 안 되는 개시제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소소한 대화를 하게 만들었다. 비행기 옆자리에는 외국인 부부가 앉으셨는데, 이륙 후 첫 기내식에서 나온 볶음 고추장의 용도를 몰라 당황하고 계셨다. 평상시라면 바로 도와드렸겠지만, 영어로 말을 하는 게 두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설렘의 작용으로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고추장에서 시작된 가벼운 대화는 비록 길지 않았음에도 나에게 여러 가지를 남겼다.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는 어떤 사소한 주제라도 즐겁다는 것. 그리고 언어 공부의 필요성. 무엇보다 대화에 있어 언어의 숙성도도 중요하지만, 수단의 완벽함 추구가 목표를 가려 도전조차 못하는 것이 제일 바보 같다는 것. 마음껏 대화하기엔 아직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언어의 배움이라는 것은 어쨌든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지, 나의 완벽 또는 치부를 드러내는 목표가 아니니까.
"여행 첫째 날의 감사 포인트; 숙소 업그레이드"
태국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숙소 직행. 혼자 여행이지만 개인적으로 숙소는 넓고 편하게 즐기고 싶어 더블룸을 예약했는데, 도착해 보니 오버부킹으로 인해 더블룸이 없어 스위트룸으로 변경해 주셨다. 세상에 혼자서 스위트룸이라니.. 혼자 온 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 세상 훌륭한 숙소였다.
숙소에 대한 감동을 가득 안은 채, 다음 감동을 받기 위해 밥을 먹으러 떠났다.
아주 놀랍게도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한인거리가 있었는데, 3일 동안 태국음식만 원 없이 먹을 테니 첫 끼만큼은 한식으로 시작했다.
거리 입구 도착부터 태국이 아니라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느낌을 주는 당황과 신기함. 가게 안 모든 사람이 한국인이어서 순간 평일 저녁 회식하는 식당 안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3일 동안 태국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깔끔히 한식을 처리한 뒤, 태국에서의 여유를 만끽할 준비를 완료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시작점인,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자칭 돼지고기 실타래.
밥을 먹었으니 이제는 간식 타임. 한인거리 바로 앞에 있는 쇼핑몰에서 가볍게 망고주스를 때리고 그렇게나 고대하던 돼지고기 실타래를 영접하러 갔다. 이름을 몰라 직원분께 사진을 보여주며 노력 끝에 찾은 내 사랑.
진짜 이거 보자마자 이번 여행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태국 여행 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능하면 이걸 경험해 봤음 한다. 진짜 그냥 먹어도 맛있고 밥에 비벼 먹으면 환상적이다.
물론 호불호가 있을 수도.. 특히 외국 음식, 향신료에 민감하신 분은 좀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추천하고 싶다.
이제는 가공육품 반입출 금지라는 규제 때문에 이 맛난 걸 태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현실이 매우 슬펐지만 눈앞에 있는 행복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태국여행하면 한국인에게 있어 꼭 경험해야 하는 것 중 하나인 태국 마사지. 하지만 나에게 있어 태국 마사지 경험은 살짝 몽글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때 가족여행으로 왔던 태국에서,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마사지를 받지 못하고 로비에서 대기했었다. 아마도 그때 갔던 마사지샵은 어린이 전용 마사지 코스가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마사지는 어른이 되면 마음껏 받을 수 있는 걸로 무의식 새김이 된 걸까. 샵에 도착해서 코스 설명을 듣고 마사지를 받는 곳으로 들어갈 때 몽글 복합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땐 못했던 것을 이제는 스스로가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곳에 도달했구나."
대학원 입학 전, 한 교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OO아, 넌 너무나도 잘하고 있어. 하지만 연구는 장기간으로,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해.
지금의 너는 열정이 너무 많아. 그 불타는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네가 지칠까 봐 걱정된단다."
그때는 교수님의 말씀이 와닿지 않았다. 열정이 불타는 게 어때서? 나는 아직도 부족하고 이보다 더욱 불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신 것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불타는 게 자신인지도 모른 채 더욱 열 내려 노력했었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기준에 못 미칠 때 스트레스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성장함에 필수 코스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교수님 말씀대로 내가 연구에 지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구에 몰두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연구에 내 삶과 자신을 뺏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재충전을 위해,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기 위한 시간으로 오게 되었다.
익숙함을 깨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다. 그 설렘은 선물 같은 시간도 주었고, 조용히 떠오르는 깨달음을 남겼다. 그렇기에 이번 여행은 삶의 여유가 바닥난 나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3일의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루하루 매 순간 다양한 선물을 받았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