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몸이 아프고서야 알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큰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커리어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려 퇴사를 함과 동시에 예상치도 못하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Productivity"
내가 추구하는 삶의 축 중 하나이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빠르고 원활하게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년, 매달, 매일 무언가를 성취했는지. 하루를 생산적으로 살아냈는지. 그런 것들이 나의 삶의 큰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외국에 살게 되며 직업이 없는 '백수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처음 맞이하는 기나긴 방학. 살면서 이렇게 오랜 기간 휴식을 취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휴식을 취하게 되며 나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감정보다 혼란과 압도감이라는 감정에 더 크게 휩싸였다. 내 삶의 주체는 항상 나였는데, 그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이 들기 시작하며 외국에서의 삶이 즐겁기보다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그 어떤 때보다 정말 많은 물음을 스스로 던지고 답을 내리며 고찰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때 당시, 가장 먼저 내 머리를 채운 물음은 '그럼 나는 뭐 하면서 살아야 해?'였다. 이 물음이 지속되다 보니 '난 왜 살고 있는 거지?'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까지 이어졌다. (우울함에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뜻의 물음이 아닌, ) 처음 맞이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이 나와야 내가 어떻게 삶을 새롭게 꾸려야 할지 그 방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려 노력했다. 그 답을 찾는 과정은 너무나도 지난했다. 사실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기나긴 과정들이 무의미했던 건 아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으니까. 바로 글을 쓰는 습관이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과 가슴을 벅차게 하는 수많은 감정들을 정리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고 나에 대한 관찰을 하며 Digging diary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무기력과 우울감이 찾아오거나 너무 많은 생각과 벅찬 감정에 휩싸이면 일기장 한 권과 펜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카페로 향하곤 했다. 좋아하는 카페에 좋아하는 시간대에 가서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시켜놓고 글만 썼다. 좋아하는 것들로만 범벅이 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기를 쓰고 난 뒤 일기장을 덮을 때 시간을 확인하면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떤 날은 두 시간, 어떤 날은 세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도 할 말이 많았구나 싶어 놀라웠다.
평생 살며 이리도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 이런 감정과 생각들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예상치도 못하게 나의 상처를 알게 된 적도 많았고,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다양한 알고리즘의 정체를 찾아내기도 했다. 내가 어떨 때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하는지, 내가 어떨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 등등. 나에 대해 많이 알아가며 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1년 넘게 3권의 일기장과 수천수만 문장의 Digging Diary를 작성하다 보니 이런 나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스스로 우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나와 친해지는 과정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친한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달에 최소 두 번씩 공유하곤 했는데, 나의 이런 변화가 친구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점점 다른 사람들과도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아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어떨 땐 나에게 큰 도움이 된 적이 많아서, 나도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반대로 나도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있었고. 뭐.. 굳이 도움이 서로 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상호작용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 마음을 먹은 것도 6개월 전인데 겁이 나 미루다 이제야 용기가 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첫 글을 어떤 주제로 작성할까 고민을 하다 가장 최근에 얻은 나의 깨달음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근 2년 사이 개인적으로 아주 큰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다. 쉽지 않은 타지에서의 삶과 그 속에서 스스로 꾸역꾸역 이어가는 말도 안 되는 도전으로 참 많이 힘들기도 하다. 그런 큰 변화를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겪어 나가는 다른 변화들을 그 큰 변화와 비교하며 '사소하다'라고 생각하고 쉽게 여겼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2024년에 내가 세운 목표 중 하나는 '과정을 즐기기'이다. 늘 목표에만 포커스 되어 목표를 달성하면 내가 얼마큼 힘들게 노력을 했던 그걸 돌아봐주고 칭찬해 주고 충분히 즐기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었다. 목표를 달성하면 바로 다음 목표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경주마였다. 그러다 보니 단기적인 목표와 가능성이 높은 목표를 많이 세우고 달성하는 삶의 반복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 모든 단기적인 목표들을 할 수 없어진 상황에서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한 부작용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다. 설상가상, 아주 장기적인 목표 - 새로 도전하고 있는 커리어에 대한 도전 -를 위해 달려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오자 엄청난 무기력감이 찾아온 것이다. 단기적인 성취물이 없는 하루하루가 지속되다 보니 무기력이 정말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자주 하게 되며 다 무의미하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짙어졌다. 아주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걸 작년에 겪으며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올해는 그 과정들을 그냥 즐기며 보내보자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분명 이 변화도 어렵겠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같은 결의 변화라 생각해 그리 큰 에너지가 쓰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성취하는 삶, 생산적인 삶이란 큰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내가 그 과정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대해서만 바꾼다는 생각에 같은 결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근 2년간 내가 겪은 아주 큰 변화들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변화란 생각이 들어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 결과, 나는 최근 대상포진에 고통받고 있다.
나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과정을 즐기려 했고, 나의 무의식과 의식이 온 마음을 다해 그 변화를 응원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 기분 좋은 요즘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삐용삐용 경고음을 울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마인드로 지내고 있었는데 몸이 왜 이럴까? 화도 났다. 왜 날 방해할까란 생각에 몸이 원망스럽고 속상했다. 내 몸이 내 마음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그런 생각에 2-3일 정도 잠식되어 있다 오늘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나 일기를 쓰면서였다. 2-3일간의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에서야 찾아낸 것이다. 그 답을 찾아내니 내 몸이 이해가 되며 마음이 몸을 달래주고 싶어졌다.
"모든 '변화'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동반한다"라는 깨달음이 그 답이다.
사소하다고 여긴 이 변화는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변화도 절대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변화라는 것 자체가 나의 관성을 바꾼다는 것인데.. 나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두 겹의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한 겹의 알을 깨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역시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 몸이 왜 경고음을 울려대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당연한 게 아니라고,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에너지를 소모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그걸 알아달라며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내 몸에게 원망보다 미안함과 애틋함이 생겨났다.
2024년을 시작하는 1월 한 달 내내 두 번째 코로나로 고생하고, 코로나가 낫자마자 대상포진으로 고생 중이다. 한 달 내내 몸이 힘들다 보니 저절로 긍정적으로 버텼던 마음도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도 다시 건강해지고 있다. '아 내가 이걸 깨닫고 올해를 시작하게 하고 싶어서 그랬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 이 고통들이 수긍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로 인해 내가 배울 점은 있다는 것을 1년 넘게 일기를 쓰고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며 깨달았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그 깨달음은 유효했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