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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석 Mar 17. 2021

우리가 열심히 외면했던 이야기들




** 2021년 2월 25일, 부산진구신문 제288호 기고


온라인 글쓰기 수업을 몇 달째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오프라인 수업만 하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강연하는 게 여러모로 곤란했다. 온라인 강사는 수강생의 호흡이나 반응을 정확히 읽어낼 수 없다. 그저 깊고 검은 카메라만 응시한 채 공간 너머의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져서 중간중간 채팅창으로 호응을 유도하고, 가끔 웃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프라인 강의실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수업과 함께 온라인 글쓰기 클럽도 하나 열었다. 매주 주제를 드리면 클럽 멤버들이 화요일까지 작품 하나를 써서 올리는 방식이다. 이어 댓글로 서로 피드백도 얹는다. 단, 날카로운 비판은 지양해달라고 미리 말씀드린다. 취업 스터디처럼 경쟁 전 연습 공간이 아닌 이상, 날 선 비판은 자칫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주에 접어든 지금, 클럽에 업로드된 작품과 피드백을 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응원과 위로가 뽀송하게 잘 마른 수건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온라인 수업과 온라인 클럽, 그러니까 배우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모이는 곳을 몇 달째 운영하면서 특이한 점을 하나 찾았다. 바로 참여자 3분의 2가 기혼 여성, 혹은 아이가 있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수강생이 쓴 과제나 작품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쓰는 글에는 언제나 지나간 시간과 사건들, 놓쳤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불안한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한동안 이 공통점을 눈으로 짚으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주부’나 ‘엄마’라는 사회적 역할이 강제된 그들에게는 온전한 ‘나’를 표현할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퇴근길 아버지의 처진 어깨나 남성 가장의 무게 등은 미디어에서 지겨울 정도로 소비돼 왔다. 물론 그러한 고난이 보잘것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 늘 헌신의 아이콘은 남편이나 아버지였다. 그러다 보니 남성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나 종류는 다양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어느새 풍부한 ‘아버지 서사’를 체득하며 자랐다.


반면에 여성 배우자나 어머니의 고민은 내조와 봉사라는 납작한 서사로 다뤄질 뿐이었다. 납작하게 눌러버린 그 틈엔 훨씬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숨겨져 있다. 운 좋게도 나는, 온라인 글쓰기 수업과 클럽을 운영하며 마침내 그 이야기들을 읽어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기성 미디어에 익숙했던 한국 남자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먼저 눈과 귀를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들의 보물 같은 글이 세상에 더 많이 나와야 마땅하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놀라울 만큼 더디다. 아직도 여성 배우자의 가사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임신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에이 요즘 누가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현실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요즘은 그렇지 않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내가 운영하는 수업과 클럽에서는 더 생생하고 날 것으로 퍼덕이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계발-위로-해탈로 이어지는 에세이 유행 흐름의 다음 파트는 바로 이분들의 이야기일 것이라 감히 말해본다.


비대면 시대로 접어들면서 타인과의 소통이 줄었다고들 한다. 여기에 물음표를 하나 던져본다. 과연 대면 시대에는 우리가 잘 소통했을까? 우리가 평소에 듣지 않았던 이야기,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됐던 이야기, 당연하고 보잘것없게 느꼈던 이야기들은 대면과 비대면의 경계와 상관없이 소통이 단절됐을 것이다. 당장 곁에 어머니가 있는데도 기혼 여성의 이야기가 이만큼 풍부한지 몰랐던(혹은 몰라도 됐던) 나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누군가를 외면해왔다.


재난은 그럴싸하게 덮어놓고 모른 척했던 문제를 모조리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나 역시 재난 덕분에 온라인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재난 덕분에 수어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재난 덕분에 목욕탕을 닫으면 씻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알려졌다. 지금 막 주목받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대면 시대에 외면했던 사람들이다. ‘뉴노멀’이라는 거창한 명제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 구축이 아니라,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았던 발화자가 이제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서사를 전시하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당신은, 나는, 제대로 읽을 준비가 돼 있는지 묻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열심히 외면했던 이야기들. 마침내 그 이야기에 닿을 수 있게 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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