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를 만난 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한눈에 들어왔다. 스키니 한 모습에 갈색 긴 머리의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남자가 머리가 긴 것도 매력적이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석처럼 저절로 내 신경이 그를 향했다.
친구는 캐나다 어학연수 다녀오고는 영어를 안 쓰니 다 잊어버렸다며 원어민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파티에 가자고 나를 몇 달째 졸랐다. 야나두로 소소하게 영어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 솔깃한 제안이면서도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친구는 전화로 오늘은 꼭 가자고 야단이었다. 약속을 더 이상 미루기 미안해서 결국 가기로 했다.
MOONLIGHT. 대학교 앞 바에서 매달 열리는 프리토킹 파티. 아니나 다를까 다들 대학생 즈음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대 중후반인 우리는 조용히 바텐더에게 논 알코올 칵테일을 주문하고 서로 눈만 말똥말똥 뜨고는 입은 뻥끗하지 못했다. 이곳은 우리가 올 곳이 아니었나 보다. 젊은이들 틈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뱉을 용기는 도통 없었다.
결국 사람들을 쳐다만 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각양각색의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뒤엉켜 커다란 음악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말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넉 놓고 쳐다만 보았다. 막상 외국인을 보니 입이 안 떨어졌다. 5분 후에 집에 가자며 불그스름한 논 알코올 칵테일만 홀짝거렸다.
긴 갈색머리의 백인이었는데 날씬해서 실루엣이 0.1초 여자일까 생각했다.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도 나처럼 처음 이곳에 온 듯 수줍은 듯 조용히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고 족히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 속에서 시선이 그에게 딱 꽂힌 게 신기했다.
그때 발랄한 한국인 여자가 우리 쪽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상큼한 그녀를 보니 우리도 덩달아 상큼한 기분이 들었다. 영어 이름은 로즈. 이름처럼 예뻤다. 그녀는 딱 봐도 이곳을 주름잡고 있었다. 영어로 말하기가 규칙인 그곳에서 한국말로 로즈에게 우리 상황을 주저리 늘어놓았다. 처음 왔는데 영어로 한마디도 못하겠고 집에 막 가려던 참이라고. 우리는 나이도 많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로즈는 자기도 30대라고 말하며 벌써 집에 가긴 어딜 가냐며 우리 손을 이끌고 뻘쭘함을 지탱하고 있던 바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우리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로즈가 어찌나 고맙던지 5분 후에 나가려던 마음이 그때야 싹 사라졌다.
그 찰나 한국인 남자가 자기는 알렉스라며 영어로 이야기를 쏟아낸다. 미국에 살다가 군대 문제로 한국에 와서 복무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사귄 원어민 친구라며 우리에게 소개를 하는데 눈이 자꾸만 가던 그 머리 긴 남자였다. 수줍게 처음 이곳에 왔다고 인사를 하는데... 어라 신기하게 영어가 잘 들리네.
그렇게 다섯 명이 동그랗게 서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나는 30대 중반의 이혼녀로 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나름 자신 있게 영어로 말했다. 내 상황에 주눅 들고 싶지 않았다. 영어도 못하는데 의기소침하기 싫어서 더 신나게 이야기했다. 분명 논알코올 칵테일을 마셨는데 내 상태는 온몸에 알코올이 번진 듯 몽롱했다.
밝은 갈색 눈의 묘한 매력의 수줍은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런 그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어서 " 너 눈이 참 예쁘다. 톰 크루즈 닮았어!" 하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을 막 끄집어냈다. [칵테일] 영화의 톰 크루즈를 떠올리며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60대 배우를 닮았다는 내 말에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영어로 말을 이어갔다. 문법이고 뭐고 틀리든지 말든지 그 분위기에 휩싸여 아무 말 대잔치를 늘어놓았다. 집에서 혼자 허공에 몇 마디 던져본 소박한 영어지만 드디어 미국인과 함께 대화를 했다는 사실에 그저 뿌듯했다!
왕초보인 내가 외국인이랑 말을 하다니! 그런 나의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우리는 5명이서 단톡방을 만들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머리 긴 그가 생각났다. 눈길이 갔던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게 너무 신기한 날이었다.
다음날 카톡 알람이 울렸다. 영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