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당첨자
이름: 이정*/ ID: or*******
앗! 내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경품같은 것에 당첨될 정도로 운이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에 당첨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를 의심할 만큼 ‘행운’과는 거리가 먼 사람, 혹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이유로 경품에 도전하는 일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경품에 당첨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어떤 회사의 홈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가게 됐고, 회원가입을 하면서 클릭 한 두개만 더하면 경품 행사에 응모할 수 있었다. 제법 작은 회사에서 하는 경품 행사였고, 내 운에 대한 신뢰도도 제로였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클릭 몇 번이 내게 줄 손해도 딱히 없을거란 생각으로, 행사에 응모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날 다시 찾은 그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이벤트 당첨자 목록이 떠 있었고,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우와!
경품은 2인 홍콩여행 상품권.
우와!
요즘은 외국을 나가면 그곳이 어디든, 거의 모든 곳에서 한국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우리에게 ‘해외’는 더 이상 미지의 세계는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 그러니까 아직 학생으로 불리던 그 시절만해도 해외여행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해외여행을 공짜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제세공과금만 내면 갈 수 있는 것인데, 당시 전체 패키지 상품가가 50만원 후반 대였기 때문에, 내가 내야하는 제세공과금은 십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경품에 당첨된 것은 난생 처음, 모든 것에 의심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제세공과금? 이건 내가 내야 되는게 맞는건가? 사기… 아니야? 내 돈만 받고 연락두절 되는 거 아니야?
당첨 사실을 주변에 알렸을 때 반응도 거의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벤트를 진행하는 회사가 지금은 이름도 기억 나지 않을 만큼 알려지지 않은 회사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곳 아니야?
네가 그런 게 될 리가 있어?
잡혀가는 거 아니야?
가면 이것저것 돈 더 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냥 가지마…
지금의 나라면 어느 여행사를 통해서 가는 거냐, 여행 담당자는 누구고,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등을 물어보면서 정보 부족에서 오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첫번째 해외 여행이었고, 당연히 해외 패키지 여행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떤식으로 진행되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차피 질문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변에서는 축하보다는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더 정확히는 나의 당첨 소식을 알게 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강권했다. 그러니 나 역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나절쯤 고민했을까? 두려움보다 손톱만큼 더 컸던 ‘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이벤트 진행 담당자가 시키는대로 여권을 만들고, 필요하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제세 공과금까지 최종 보내면서 예약을 확정했다. 인천공항으로 떠나는 날까지 엄마는 ‘어디 잡혀 가는 거 아니야?’ 란 말을 끊임없이 하셨고, 나도 실제로 공항에서 여행 담당자를 만나 항공권을 손에 들기 전까지는 그 의심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떠났다. 내가 합류했던 여행 그룹은 부모님과 아들, 그리고 예비 며느리가 한팀 그리고 나와 내 친구 한 팀 이렇게 두 팀이 함께하는 조촐한 여행이었다.
그것이 나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를 넘어선 곳에도 사람들이 산다는 것, 우리나라 말이 아닌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여름이라고 다 같은 여름이 아니라는 것, 네모 반듯한 건물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빛나는 야경을 염두해두고 건물과 조명을 만드는 곳도 있다는 것, 45도가 넘는 급경사를 올라가는 트램도 있다는 것, 2층 버스가 도시를 다니기도 한다는 것, 풍수지리를 생각해 건물의 중앙을 뚫어 놓기도 한다는 것, 바다위에 떠있는 식당도 있다는 것, 만두의 종류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 등, 지금까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내 눈으로, 내 귀로, 내 가슴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다녔던 여행들, 내가 발 디뎠던 나라, 도시들에 비한다면 홍콩은 어쩌면 가장 특별할 것이 없는 곳일수도 있다. 여행을 좀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 봤을 만한 곳, 한국과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자주도 갈 수 있는 곳, 한국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동양인들이 가득한 곳, 대단한 자연 경관이나 웅장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곳. 하지만 나에게 이곳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을 넘어선 ‘세계’를 처음으로 보여준 곳이기 때문이다. 패키지 해외 여행에 대해 몰랐던 내가 출발하기 전까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두려움을 해소할 수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수도,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답을 찾을 수도 없다. 홍콩 여행으로 나는 한국 너머의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손톱 만큼이나마 생겼고, 실체가 없던 세계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나에게 ‘첫 해외여행’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만났던 외국이라는 세상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에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을 깨닫게 해주었다. 대한민국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사는 사람들은, 심지어 성인이 된 대학생들 조차도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따라가는 삶을 산다. 그렇게 살아도 어렵지 않게 삶이 살아지니까. 혹은 그렇게 살아야 좋은 학생이니까. 그러나 학생을 벗어날 때부터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때부터는 따라가는 삶만으로는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각자의 삶을 완성해간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지금에 머물것이냐, 아니면 그 관성을 깨고 나아갈 것이냐에 대한 선택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머무는 쪽은 훨씬 더 쉬운 선택이라는 걸. 물리적으로 쉬울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편안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선택의 결과 역시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변화를 주었을 때 만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선택이 끝나기 때문이다. 우연히 들어간 홈페이지에서 어차피 안될 것이니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돌아 나올 것이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품을 신청할 것인가 대한 선택을 했고, 경품이 당첨된 후, 무언지 모르지만 무언가 이상하니까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볼 것이냐를 선택해야했다. 나는 이 두 번의 선택을 관성을 깨는 선택했고, 그 결과와 나의 운(어쩌면 다시없을)이 더해져 내 인생에서의 ‘첫’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첫 경험은 내게 삶의 목표를 만들어주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상을 보겠다는. 조금 더 보고, 더 많이 궁금해하겠다는, 머무는 쪽이 아니라 나아가는 쪽을 택하는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말이다. 이것은 다소 나를 고달프게 할 수 있는 삶의 방향이지만 그것이 나에게 맞는 삶이고 무엇보다 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 첫 경험이 알려줬다. 그렇게 나는 아마도 끝까지 끝나지 않을 여행하는 인생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미운 마흔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