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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l 29. 2020

나이가 만든 인생 규칙


가끔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태어날 때 생명 기간이 담긴 사탕 주머니를 하나 들고 나와 매년 하나씩 꺼내먹는다고.

사탕을 다 먹으면 죽음이 찾아온다는 조금 무서운 상상이다.

내 생명 주머니에 사탕이 몇 개나 남아 있을까.

처음에 왜 이런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는 그 사탕의 개수가 궁금하다.


공자가 한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나이라는 숫자에 많은 의미를 둔다.

때론 '나잇값을 하라'며 가르치려 든다.


그럼에도 우린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 됐다고 축하를 하고

서른이 되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소주를 마신다.


마흔이 되고 자꾸 집을 나가고 싶어 여행가방을 싸두었다는 사람도 봤다.

그리고 또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새로운 취미를 만들 수도 있고, 평생 안 사본 것을 사겠다며 적금을 깰 수도 있다.

예순이 넘으면 환갑이라는 의미를 두고 가족 식사를 하는 것도 모두 넘어가는 산이다.


나 역시, 뭔가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삼십대라는 나이의 중압감에 못 이겨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막 서른이 된 후배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서른이 됐는데 뭘 해도 재미가 없어."


그날 저녁, 마흔이 된 선배를 만나 물었다.


"마흔이 되면 기분이 어때?"

"기분? 그런 거 없어. 뭘 해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가."




내가 마흔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어떤 주제로 흘러간다는 것을.


심지어 새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알게 된 PD나 부장, 국장 같은 사람들은 프리랜서 방송 작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의 패턴을 선보였다.


1. 어떤 일을 하셨나요?

 

그는 지금 '나의 경력'을 '자신의 필요'와 매칭 하는 중이다.

본인이 필요로 하는 자질을 갖췄는지 가늠하며 간을 본다.


2. 결혼은 하셨나요?


사생활이 바쁘냐는 뜻이다. 퇴근을 일찍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는 의미도 있다.

혹은 돈이 아쉽지 않아 언제든 때려치울 부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알고 싶다는 것.


3. 아이는 있으신가요?


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주춤한다.

애 엄마 작가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하다.

작가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전국 어느 곳에서 또 많은 면접 과정에서 이런 반응을 만날 수 있다.

서로 알면서도 묻는 건 '육아 때문에 소홀하지 말 것'을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4. 아이가 몇 살...?


아.. 네.... 대답을 어물거리며 불쾌감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본다.

뒷걸음칠 쳐서 나를 보고, 나를 보는 그 앞에 사람을 본다.

순수한 질문이라기엔 우리 만남이 너무 처음이니까, 기분이 나쁘다.

그런데 다음 질문이 이어질 줄은....


5. 나이가... 마흔이라면서요?


그게 질문이 될 줄 몰랐다.


 



 

방송작가가 꿈이었던 소녀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글 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밤 라디오를 듣다 잠들었고, 수첩을 들고 다니며 뭔가를 적었다.

시도 보고, 소설도 보고, 영화도 열심히 봤다.

그게 나의 꿈이니까 나는 짜릿하고 새로운 이야기 속에 살았다.


대학교 4학년 여름이었을까.

라디오 방송국에서 작은 일을 하게 됐을 때 -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같은, 무시무시하게 고상한 문장들을 떠올렸다.

 

약속하지 않는 날에도 꼬박꼬박 출근해 피디 등 뒤에 앉아 목소리들이 전파를 타고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음악이 나오고, 볼륨이 커지고, 소리가 가득한 스튜디오에서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노래들을 들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들었다.



<<내 나이 마흔 살에는>>

- 양희은


봄이 지나도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

빨리 어른이 됐으면

난 바랬지 어린날엔


나이 열아홉 그 봄에

세상은 내게 두려움

흔들릴 때면 손잡아 줄

그 누군가 있었으면


서른이 되고 싶었지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나갈까

무섭기만 했었지


가을 지나고 어느새

겨울 지나고 다시 가을

날아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다시 서른이 된다면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그 빛나는 젊음은

다시 올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우린 언제나 모든 걸

떠난 뒤에야 아는 걸까

세월의 강 위로 띄어 보낸

내 슬픈 사랑의 내 작은 종이배 하나





양희은 아줌마가 이런 노래도 부르셨네, 정도의 호기심으로 듣고 말았던 노래.

그 노래가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완벽하게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다.


나는 스스로 만들지 않았던 자극이었다.

별로 관심도 없는 숫자였지만 사람들은 사람들은 자꾸 물었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몇 살이라고요? 나이가 마흔이라고요? 아이고 작가님.... 그렇게 안 보이세요."


노랫말처럼 위로를 던졌지만, 받지 않았다.


내 나이만큼 주머니 속 사탕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괜찮다.

그대신 내 수첩은 많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수첩을 들고 다니고 메모를 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꾸기도 한다.









내 언젠가의 꿈이었던 곳에서 날개를 달고 이미 날았다는 것을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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