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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Nov 18. 2021

초라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초라한 것도 나쁘지 않다고,

차라리 초라해지겠다고 말하는 날.

그날, 내가 선택한 책은 장 폴 뒤부아의 <케네디와 나>였다.


그러니까, 발단은 꿈을 꾸면서부터다.

어디서인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검은색 속옷이 비치는 하얀 바지를 입은 PD(찬조출연 사실을 그는 모르겠으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답답하고 좁으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 그곳을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PD의 흰 바지가 눈에 거슬려서일 수도 있고 흰 바지 안으로 비추는 검정, 혹은 감색 같은 속옷의 라인이 내 눈을 불편하게 해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모든 정황들에 논리적 이유를 댈 수 없다.


내가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내 몸을 움직일 때 습관적으로 발밑을 보았는데 내 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발밑을 살피는 습관이 있는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  땅을 딛는 것이 두렵고 어쩌면  안주하길 바라는)


벌레를 발견한 즉시 밟지 말아야겠다고 발을 들었는데 아뿔싸,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속도벌레들이 모여들었다. 벌레라고 표현하면 너무 모호할 수 있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자면, 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서 보던 송충이처럼 하얀 발들이 무수히 달려있는, 하지만 애벌레처럼 통통하게 몸을 살찌우고 느리게 움직이는 그런 벌레였다.

조금 다른 것은 초록의 빛이 연출되는 실루엣이 아니라,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는 것.

그 기이한 빛깔에 조금 놀라 움찔했을 때 눈은 최첨단, 초고밀도의 접사렌즈처럼 현미하게 대상을 살펴 들어갔고 완벽하게 클로즈업된 순간 가운데 두 줄, 벽돌색 비슷한 빨간색에 쳐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여하튼 이것은 꿈이었다.

발끝은 물론 눈앞에 가득한 벌레들을 보며 소리를 지르며 옆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아주 다급한 꿈이었다.

꿈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꿈에서조차 그 광경에 소름이 돋았고, 불쾌했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약속된 콘티처럼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에 빛이 침대로 길게 들어와 버린 아침이었다.

눈을 떴지만 가만히 누워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빠졌다.

벌레가 내 눈앞에 없다는 것에 안도했으나, 나른한 겨울 아침에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와야 하는 약속들이 부담스러웠다. 열정적으로 다가가기 싫은 오늘의 일과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초라해졌다.

초라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내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좀처럼 하지 않던 이상 행동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의 나처럼, 늦었는데도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아침밥을 챙겨 먹는다든가, 나를 대변하거나 상징하는데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주황색 셔츠를 꺼내 입는 일 따위의, 어제와 다르지만 오늘은 괜찮아지는 그런 행동들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 나는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문득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느슨해져 현실에 있지만 현실감을 잃은 채 떠 있는 것 같은 하루를 -

빠져나오겠다는 의지보다는 차라리 빠져있겠다고 내버려 두는 -

그래서 초라한 나를 마주 보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

비겁하지만 또 용기 있는 나를 -


만약 어젯밤, 장 폴 뒤부아의 <케네디와 나>를 읽지 않았다면 오늘의 초라함에 미소 짓긴 힘들었을 것이다.



p.43

하지만 우리가 다시 함께 오늘, 날씨도 좋고 시가도 나눠 피우다 보니 인생은 역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특히 우리가 서로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세상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세상의 지붕이라니!

세상의 지붕 위에 올라간 듯한  느낌을 가져본 것이 언제인가.

게다가 그저 누군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시가를 나눠 피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거대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인간의 내면은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그러니 내가 그와 다시 함께, 내가 그녀와 다시 함께 우리의 통일된 관점을 나누며 세상의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 선물하는 몇 가지 마력 중에 하나일 것이다.


p.168

하지만 사람은 20년 이상 누군가와 살다 보면 마침내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하게 된다. 아예 그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아주 오래전 어느 짧은 순간에 겪었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특별한 하루를 기억하게 하는 표정이며 그 사람의 몸짓에서 예전의 누군가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가끔, '나와 살아가는 나'에게서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말이어도 좋고 다양한 인격이라는 의미여도 좋다. 내가 나와 살아가는 것이 괜찮으냐고 물어볼 때, 또 다른 나는 되묻는다.


"질문이 뭐지? 뭐가 괜찮냐는 거야?"


내가 나인 것이 확실한, 아니 내가 나인 것이 썩 괜찮아 보이던 아주 오래 전의 작은 표정에서, 나의 행동에서 그렇게 반복되는 상황에서의 특별한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에,  나는 나에게 되묻는 나에게 말할 수 있다.


"이거 말이야. 이런 나. 썩 괜찮지 않아?"라고



p.258

나는 순한 맛의 피터 스튜 베이선트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가슴에 귀뚜라미가 가득히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첫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어제 나는 권총을 샀다.'


                                           

막다른 길 앞에 서서 내 인생의 처음을 기억해 본 적이 있다면, 이상하게 처음의 내가 얼마나 대견하게 느껴진다.

떠도는 듯 흔들리던 오늘 같은 초라한 일상에서 나는 마음껏 떠돌며 내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았는데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내가 가스불을 껐는지 안 껐는지를 몰라 77번 국도 '자유로'에서 자유롭게 유턴을 감행할 수 있는 것 같은 그런 무모한 되돌림도 모른다.

처음의 생각을 되짚어 내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를 더듬는 일 따위도 결코 나의 삶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처음을 기억하던 블랙코미디의 주인공 폴라리스가 순한 맛의 피터 스튜 베이선트에 집착하듯 내가 주황색 셔츠로 과거의 어느 날을 박제하기로 결정한 하루는 귀뚤귀뚤.. 귀뚜라미가 가슴에 진동을 하는 '처음'에 대한 설렘이다.


그러니. 초라하다는 느끼는 날,

초라한 것도 썩 나쁘지 않으며, 차라리 초라하겠다고 내버려 두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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